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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해야 할 친구들 - 죄책감, 분노

Written by 이건호 | 18년 12월 29일

구체적으로 어떤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

부정적 감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과거의 경험과 관련하여 주로 현대인의 발목을 잡는 것은 죄책감, 분노 그리고 자부심을 들 수가 있다. 죄책감이라는 것은 자신의 실수, 어리석음 때문에 부정적 사건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다. 잘못을 저질렀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사건이 이미 종결된 뒤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힌다. 그러면서 자신이 양심이 있는 존재라는 것에 위안을 느낀다.


죄책감은 인간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죄책감이 없다면 죄를 짓고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같은 죄를 반복할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더 큰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에서는 죄책감을 강조한다. 남을 탓하기 보 다는 자신을 탓하라는 말씀은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이상의 죄책감은 삶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한다. 죄책감에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은 ‘교훈'이다.

한순간의 판단착오나 실수로 인해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그것으로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착오나 실수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앞으로는 절대 그런 상황에서 그런 착오나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고 나서도 지속해서 자신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은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의 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을 탓하기만 한다. 이럴 때는 정말 속수무책이다. 자신을 탓하는 것에서 오는 아주 저급한 쾌감을 즐기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런 저급한 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영원히 자신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에 매달 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타인들도 그를 원망하게 된다. 과도한 죄책감이 가져오는 폐해이다.

정씨는 10대 아들의 자살로 인해 ‘자식을 죽인 부모‘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매일매일을 지옥처럼 살았다. 어느 가을 날 평소처럼 퇴근 후 집에 돌아 오니 언제나 듬직하던 10대 후반의 아들 이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아들도 말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그런 사정 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 때부터 자신을 ‘자식을 죽인 부모‘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처벌하면서 살아왔다.

아들이 목숨을 끊을 만큼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아버지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 하고, 아니 이상한 낌새를 몇 번 눈치 챘으나 ‘별 일 아니겠지'하면서 애써 외면했던 기억들이 떠 올랐을 것이다. 자신도 바쁘다는 이유로 ‘ 다 큰 놈이 지 인생 지가 알아서 살겠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넘겼을 몇 번의 기회들이 날카로운 죄책감의 화살이 되어 아버지의 가슴에 꽂혔다.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심리적 방황을 거듭하던 그는 자살예방센터에서 운영하는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 모임은 정씨와 같은 사연이 있는 유족들의 모임이다. 같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끼리 마음 터 놓고 애기를 해보니 아들의 극단적 선택이 꼭 아 버지의 무관심 때문만은 아님을 알게 되어 무거운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고 한다. 정씨처럼 자신이 직접 영향을 끼치지 않았더라도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고 무거운 죄책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죄책감에 ‘사로 잡히게 되면'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된다. 더 심한 것은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인해 타인에게 고통 준 경우이다. 한 순간의 운전 실수로 피해자에게 회복될 수 없는 장애를 입히거나 또는 목숨을 앗아갔다면, 그에 대한 죄책감 의 무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양심은 끊임 없이 죄책감을 만들어 내고 죄책감은 스스로도 피해자와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소리친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은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다. 이럴 때는 잘못에 따르는 처벌을 달게 받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보상을 하는 등 자신의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나머지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한 자신이 원망스럽겠지만 끊임 없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해서 결과가 ‘돌이켜 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사실,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더 자주 인간을 사로 잡는 부정적 감정은 ‘분노'이다. 게다가 분노는 죄책감보다 에너지가 더 많다. 그래서 분노는 경우에 따라서는 진짜 폭탄처럼 갑자기 폭발해 버리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대부분 몇 번씩은 그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분노가 폭발하는 경우도 있고, 남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본 적도 있을 것이다.

 

분노의 대부분은 좌절된 욕망에 의한 것이다.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할 때 항상 분노가 발생한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던 비물질적 것이던 관계 없이 사람들은 소유하고자 하는 시도가 실패할 때, 그 소유실패의 원인이 되는 대상 을 향해 강제력과 협박, 비난을 동원한다. 짜증을 잘 내고, 욱하기 쉬우며, 과격하고, 불안정하고, 툭하면 분개한다. “두고 보자.”라는 말대로 꼭 되갚아 주려 한다. 분노는 어떻게든 타인을 통제해서 자신의 소유시도를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운전시 생기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는 것을 '로드 레이지 road rage'라고 한다. 최근에는 도로에 CCTV도 많이 설치되었지만 블랙박스를 장착한 차들도 많아서 로드 레이지의 생생한 사례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위험하게 자신의 앞으로 끼어든 다른 차에게 화를 내는 것은 그나마 정상적인 분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위험하게 끼어들기를 하려던 사람이 상대방 차가 끼어들기 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그 차를 뒤에서 받아 버리고, 자신의 차에서 내려 끼어들기를 방해한 상대방 차의 운전자를 폭행까지 한 사건이 있었다. 이런 경우는 가해자의 심리적 상태를 어 떻게 설명을 해야할까?

자신이 위험한 행위를 먼저 하려고 했는데 상대가 이를 허용하지 않자 분노를 한 것이다. 정말이지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사자성어가 딱 어울리는 그런 사건이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응당 해주어야 할 양보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런 유형의 분노는 화내는 사람이 자신은 원하고 욕구 하는 것을 – 비록 그것이 불법적인 것이라 하여도 – 가질 자격이 있다고 느끼며 불가능한 기대를 가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만한 자격 있다'는 이런 유아적 신념이 자신의 소유행위를 방해한 상대방 운전자가 불공정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끔 하는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분노는 폭력적이라 처음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타인을 제압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분노가 폭발하는 그 짧은 순간에 느끼는 쾌감을 즐기는 탓에, 분노를 잘 하는 사람들은 더욱 분노에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를 파괴하는 것임을 곧 깨닫게 된다. 누군가 분노 를 폭발하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그를 피하려고 한다.

정말로 무서워서 피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과 얽히지 않기 위해서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에서 분노하는 사람은 쾌감을 느낀다. 세상이 자신을 경외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지난 2016년 일용직 근로자이던 A씨는 로또 복권에 당첨돼 약 27억 원의 실수령액을 . A씨는 당첨금으로 어머니와 함께 살 집을 마련하고 어머니를 모시려고 찾아갔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두 여동생은 오빠 A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가지 못하도록 막고, 당첨금 배분을 요구했다고 한다.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20여 년간을 떨어져 산 여동생들인데도 거의 욕설과 협박으로 오빠인 A씨를 몰아 부쳤다.

그 뿐 아니다.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A씨가 더는 상대를 해주지 않자, 두 여동생은 어머니를 내세웠다. 이들은 ‘로또 당첨 후 엄마를 버리고 간 패륜아들’이라고 적힌 피켓을 만들어 어머니가 1인 시위를 하게 했다. 어머니는 피켓을 들고 있으면 곧 큰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두 딸의 말만 믿고 1인 시위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A씨가 자신들을 만나주지 않자, A씨의 집으로 직접 찾아 가 잠긴 열쇠를 강제로 따고 집으로 침입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은 A씨로부터 고소를 당했고, 법원은 두 여동생과 그 남편에게 협박과 주거침입 혐의로 응당한 처벌을 내렸다.

그런데 8개월 가량 이어진 법정 공방에서 두 여동생은 자신들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검찰의 추궁 끝에 협박을 한 사실만 일부 자백했을 뿐이다. 이 사건은 겉으로는 ‘노력 없이 얻은 일확천금이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는 진리를 되새겨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그러나 조금만 더 속을 들여다 보면, 정작 ‘노력 없이 일확천금을 얻은’ 당사자 A씨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동안 모시지 못하던 어머니를 모시고자 아파트도 장만했다. 이렇게 자신의 혈육을 챙기려는 의도를 봐서는 시간을 두고 그 동안 소원했던 여동생들과의 관계도 조금씩 회복해 갔을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신문기사에 따르면 여동생들과의 왕래가 줄어든 것은 서로의 곤궁한 사정 때문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행운의 당사자가 아닌 여동생들이 만든 것 같다. 오빠가 얻은 행운에 대해 자신들도 정당하게 배분 받아야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마치 칼로 무 베듯 한방에 해결해서 돈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여동생들은 그것이 당연히 올바르고 공정하다 생각했다. 아마도 그간 어머니를 음으로 양으로 모셨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겠다는 심리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8개월간의 길고 긴 법정공방에서도 전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것을 주지 않으니 오빠에게 분노를 한 것이고 그래서 각종 협박과 주거 침입과 같은 폭력적인 불법행위들로 오빠를 몰아 부친 것이다. ‘내게 소유할 자격이 있다. 그런데 오빠란 자가 불공정하게 내 것을 주지 않는다' 생각이 분노를 일으키고 그 분노는 모든 불법적인 행위를 정의로운 행위로 여기게끔 만든다.

그러나 저간의 사정이 어찌 되었던 그런 분노는 결국 법적 처벌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여동생들에게 돌아왔다. 누군가 화를 내면 사람들은 처음에 두려워하고 겁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며칠 후 폭풍우가 잠잠해지면 다른 반응들이 고개를 든다. 사람들은 그가 이성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불안해하지만 또한 그가 화나서 쏟아낸 말들에 원한을 품는다. 또한 사람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보복할 기회만을 기다릴 것이다. 결국 분노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게 되면 자신이 폭발시킨 분노 가 몇 배 더 커진 보복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