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불확실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보통 안개가 자욱한 상태를 상상한다. 몇 해전에 가족들과 대관령 근처로 놀러 갔었는데 그날은 시도 때도 없이 안개가 끼었다, 걷혔다 했다. 안개가 너무 자욱할 때면 모든 차들이 깜박이를 켜고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마치 이런 날처럼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바로 눈 앞에 깜박거리는 다른 차들의 뒤꽁무니만을 쫓아 엉금 거리며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요즘의 불확실한 환경은 안개 낀 것 보다 더 위험한 듯하다. 나도 중년이 되어 경험을 해 보니 중년에 맞이하는 실제 불확실성은 마치 지진과 같다는 것을 느꼈다. 지진이 일어나면 지형 지물이 바뀐다. 건물은 무너지고 길이 바뀌어 전혀 다른 세상이 되는 것이다. 즉, 게임의 룰 자체 가 바뀌는 것이다. 안개가 끼었을 때는 속도를 줄이고 침착하게 지도를 참조하여 길을 따라 가면 된다. 그러나 지형지물이 바뀌는 환경에서는 지도 따위는 소용없다.
왜냐하면 목표도 길도 다 바뀌어 버리니까. 요즘 같이 저성장에다가 불확실성마저 높은 세상에서 제2의 인생으로 전환해야 하는 중년들이 직면한 상황은 안개처럼 기존의 길들이 보이지 않는 정도가 아닌 지진처럼 아예 길들이 사라지는 정도의 충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이 아니라 변화 무쌍한 바다-혹은 사막-를 건 너는 것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늘 유동적인 바다나 사막에서는 ‘목표’라는 것이 무의미하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세워 놓았던 목표가 사라지고 없는데 '목표'를 세운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마찬가지로 바다나 사막에서는 뭔가를 ‘달성한다’ 또는 ‘정복한다’는 개념이 별 의미가 없다. 바다의 어느 지점에 도착 한들 무슨 소용이며, 사막의 어느 모래언덕 정복한들 무슨 소용인가. 그것들은 신기루처럼 곧 사라지고 말 것인데 말이다.
바다와 사막에서는 목표보다는 ‘방향과 기회‘가 더욱 중요하다. 올바른 방향을 알아야 표류하지 않고 바다를 건널 수 있고, 가다가 만나는 오아시스 같은 기회를 잘 활용해야 사막을 무사히 건 널 수 있다. 인생 후반전에는 달성해야 할 목표를 세워 놓고 공연히 힘을 뺄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을 향해 욕심내지 않고 차근차근 가지만 가다가 만나는 창발적 기회들을 잘 선택해서 쉴 때 는 충분히 쉬고, 발판으로 삼을 때는 발판으로 삼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되면 후반 전의 삶이 ‘존재지향적’으로 전환된다. ‘존재지향적‘이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활동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독서처럼, 행위 그 자체가 행복한 경험이 된다면 그것이 존재지향적 삶인 것이다. 어떤 행위를 통해 미래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소 유지향적 태도인 반면, 그 행위 자체를 즐기면서 거기에 몰입하는 것이 바로 존재지향적 태도인 것이다..
그대가 인생 전반전, 산을 오르는 시절에 있다면 소유지향적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달성하고 정복하고 성취'하라. 전반전에도 소유지향적 목표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아무도 가지 않은 차별적인 삶을 용감하게 헤쳐나간다면 좋지만 그렇게 하기엔 공부와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자신에게 적절한 산을 목표-서울 북한산이던 네팔의 에베레스트산 이던-로 삼고 일로매진一路邁進해나가도 좋다. 가다가 그 산이 아니라 해도 전반전에는 후반전이 있기에 재도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인생 후반전, 바다나 사막을 건너는 시절에 있다면 전반전처럼 살 수는 없다. 전반전에 상대가 도저히 따라오지 못할 만큼 큰 점수를 냈다 하더라도, 이제는 전략을 바꾸어야 한다. 모든 소유지향적 목표를 버리고 '방향과 기회'를 따라 존재지향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게 그 시절에 어울린다.
그렇지만 평생 소유지향적 목표와 이를 성취하기 위한 행위에만 길들여진 사람들은 바다 위에서도 등반을 하려 한다. 이들은 오직 성취감으로 포장된 소유욕, 통제욕에 의해서만 행복을 느낀다. 가령, 독서도 그렇다. 이들은 독서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소유지향적 목표가 없기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흥미로운 책 몇 권은 소일거리 하느라 읽겠지만 깊이 있는 독서는 하지 못한다. 이들에게 독서를 하는 동안 머리 속에서 끊임 없이 ‘책 읽는다고 돈이 나와, 밥이 나와?’라는 에고의 불평이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재 수행하는 행위 자체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존재지향적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냥 행위 자체를 즐겨야지 하고 속으로 다짐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아니다. 내게 다가오는 창발적 기회를 알아볼 때와 마찬가지로 존재지향적인 삶을 위해서도 추구하는 방향, 즉 가치가 있어야 한다. 바다나 사막을 건널 때와 같다. 올바른 방향을 모르는 채, 열심히 노를 젓는 것은 그저 무의미한 표류일 뿐이다. 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해 노를 저어야 노 젓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 후반전에는 무엇보다도 사는 동안 추구할 ‘가치’를 반드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 방향이나 가치는 ‘추구‘하는 것이지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동쪽’을 향 해 갈 수는 있지만, ‘동쪽‘에 도착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동쪽’은 방향(가치)이지 장소(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이 은퇴한 이후로 대형병원에 청소부로 취직한 박씨 아주머니는 여느 때와 같이 자신이 맡은 병실을 열심히 청소하고 있다. 그런데 잠깐 잠이 들었던 환자의 보호자는 그 모습을 미처 보지 못했나 보다. 일년 째 혼수상태에 빠진 남편을 밤새 간호하던 보호자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는 박씨 아주머니를 보더니 '왜 청소를 하지 않았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아주머니는 이미 병실 청소를 깨끗하게 했다고 말했지만 보호자는 분노를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 순간 아주머니는 그 보호자의 마음을 헤아렸다. 보호자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쌓인 스트레스에 시달리 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보호자 앞에서 아무 말 없이 다시 청소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심신이 지친 보호자가 평온함을 유지하고 용기를 갖도록 도운 것이다.
그 뿐 아니다. 자신에게 할당된 청소구역을 후딱 해치우고 퇴근하려는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박 씨 아주머니는 수술 후 병실복도를 힘겹게 걷는 환자를 보면 복도 걸레질을 멈추기도 하고, 밤새 간호를 하다 쪽잠을 자는 보호자가 있으면 그 병실은 나중에 청소했다. 아주머니는 비록 남들이 청소부라는 직업을 업수이 여겨도, 자신은 청소라는 행위로 환자와 그 보호자의 지친 마음을 돌 볼 수 있다는 것에 자긍심을 느낀다.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라는 가치를 추구한다. 그리고 청소와 배려라는 행위를 통해 하루하루 그것을 실천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류모머스키 소냐 따르면 실제로 병원의 청소원 28명을 대상으로 인터뷰
한 결과, 청소 일을 싫어하고 별다른 기술이 필요 없다고 여기며 꼭 필요한 최소한의 일만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자신의 직업을 좀 더 크고 의미 있는 일로 바꿔놓은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박씨 아주머니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단순히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 아니라 환자, 방문객, 간호사들의 일상을 개선시켜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람들과 활발하게 교류했고 자신이 맡은 청소 일을 좋아한다고 대답했으며 그 일에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그들은 벽에 걸린 그림을 다시 배치한다든지 들꽃을 꺾어와서 장식을 하는 등 규정에 정해진 임무 이상의 일을 했다. 자신을 보다 크고 통합된 전체의 일부로서,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켜주는 시스템의 일부로서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안정적인 지위와 보다 많은 월급이라는 소유지향적 목표가 아니라 ‘이타적인 봉사’라는 가치를 추구하게 되면 '지금/여기'의 행위 하나하나에 의미가 생기게 된다. 물론, 소유지향적 목표도 목표달성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목표를 달성(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 강력하여 결국은 ‘소유’ 그 자체가 가치를 대체하고 만다. 소유는 해도 해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허기, 그것이 소유지향성의 강력한 무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지향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 어렵다. 그리고 자신의 현재 삶이 소유지향적임을 깨닫지도 못한다. 혹여 자신의 삶이 그렇다는 것을 깨 닫더라도 그것이 왜 나쁜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게 산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뭐가 나쁜 것인가?” 그러나 소유지향적 목표를 중심으로 하는 삶은 궁극적으로 피폐해진다. 소유지향적 삶은 늘 win-lose 의 패러다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게임에서는 반드시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소유지향적 경쟁에서 밀린 패자는 말할 것도 없이 삶이 불행하다. 그러나 이 게임에 서는 승자도 결코 행복해지지 않는다. 승리에 대한 잠깐의 행복은 맛보겠지만 점점 더 큰 승리를 욕망하게 된다. 이렇듯 승리에 도취되거나 중독되면 행복한 삶은 더욱 어려워진다.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 배우 릴리 톰린은 이런 소유지향적 게임에서의 승리자를 향해 코미디언답게 유머러스한 비판을 한 적이 있다.
‘쥐들의 시합(rat race/무의미한 경쟁)에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는 설사 경쟁에서 이긴다고 해도 여전히 쥐일 뿐이라는 점이죠.’
뿐만 아니다. 이미 40년 전에 독일 태생의 영국 경제학자인 슈마허 역시 이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남겼다.
“탐욕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 즉 그것을 전체적으로 보는 능력을 상실하며, 그래서 그의 성공은 곧 실패가 된다. 사회 전체가 이런 악덕에 오염된다면, 놀랄만한 경제성장을 달성 할 수는 있어도, 개개인은 그것을 체험하지 못하고 점점 더 좌절, 소외, 불안정 따 따위 시달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015년에 서울에서 이와 관련된 비극이 있었다. 실직한 가장이 가족을 살해하고 경찰에 붙잡혔다. 동반자살을 하려 한 것인데 정작 자신은 자살하지 못한 채 경찰에 잡힌 것이다. 실직을 했다하니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그들의 재산을 다 정리해 본 결과 통장잔고와 부동산을 합쳐 무려 10억이 넘었다고 알려졌다.
생활고가 아닌 것이다. 가장은 서울에서도 명문대를 나와, 외국계 기업을 다녔다. 잘 나가다가 실직을 했지만 아직 40대이고 경력이 그만큼 있으니 곧 비슷한 수준의 회사에 재취업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1년을 열심히 알아봤지만 다시 과거의 명성에 어울리는 그런 회사를 찾을 수 없었다. 밀려오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결국은 비극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모두들 비극의 원인을 생활고가 아니라 가장의 심리상태에서 찾고 있다. 아마도 이 어이없는 한 단란한 가족의 비극은 자신의 터전이 바다로 바뀐 줄 모르고 바다 위에서 등반을 하려고 노력하던 가장의 심리적 좌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소유지향적 목표와 그것을 달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취감, 존재감 등은 인간에게는 마약과 같은 중독성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