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소유지향적 목표가 동기를 부여하는 힘은 강하다. 소유지향이라는 그 속성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이나 욕망과 같은 감정을 활용해서 동기를 부여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유지향적 목표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적어도 좋은 전략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지는 순간 우리는 전전 긍긍하고 노심초사하며 고군분투하는 삶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미래의 소유지향적 목표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에 집중하는 상태를 장자는 '소요유 逍遙遊', 한가로이 이리저리 거닐며 노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아무런 갈등을 빚지 않고 물처럼 흘러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상아吾喪我 , 즉, 스스로 자신의 장례를 치른 후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상에 의해 프로그램된 신념과 목표 등,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 오던 사회적 잣대를 모두 버린다는 것이 바로 ‘자신을 스스로 장례 치른다'의 의미일 것이다.
얼마 전에 가족들과 한편의 영화를 보았다. 1800년대 후반 동굴에서 성모 마리아를 목격했다는 프랑스의 성녀 베르나테트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다. 영화 속에서 카톨릭 성당의 신부(神父)는 수녀가 되었으나 특별한 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수녀로서의 미션을 부여 받지 못한 베르나데트에게 ‘쓸모 없다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쓸모 없어도 좋으니 네가 아닌 사람이 되지는 마라‘라고 위로한다 그러면서 ‘쓸모 없는 나무’ 이야기를 베르나데트에게 들려준다.
심하게 휘어지고 휘어진 곳마다 옹이가 박혀 땔감으로도 목재로도 쓸 수 없었던 나무는 벌목꾼들이 베어 가지 않았다. 덕분에 그 나무는 훌륭하게 자라서 아주 멋진 자연 그대로의 나무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 오묘한 자태를 숭상하며 보호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가 장자에도 나온다. 대목장이 자신의 제자를 데리고 건축 재목으로 쓸 나무를 구하러 길을 가다가 어마어마하게 큰 참나무를 보았다. 그런데 대목장은 그 참나무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대목장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처럼 오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대목장의 꿈속에 그 참나무가 나타나 말하길, ‘만약에 인간의 관점에서 쓸모가 있었다면 이미 사람들이 나를 잘라버렸을 것이다. 나는 아무데도 쓸모가 없기에 오늘날과 같이 위대한 존재가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하늘이 준 나의 큰 쓰임새’라고 말했다고 한다.
'쓸모'란 사회와 타인의 잣대이다. 그 시대의 사회적 기준으로 '쓸모'가 없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태생적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신부의 말은 사회적 기준에 미달되어도 좋으니 굳이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회가 주입한 모든 신념과 목표를 놓아 버리고, 장자 가 얘기 하듯 '쓸데 없이 들판에 나가 빈둥빈둥 거리기'를 통해 소요逍遙 하면서 놀고遊 있다면, 아마도 사회적 기준으로는 그것이 '쓸모 없는' 행위이자, '쓸모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대목장의 꿈에 나타난 참나무처럼 가장 쓸모 없는 것이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 속에 내재 된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잣대에 맞추기 위해 필요한 모든 소유지향적 목 표에서 자유로워진 후에라야 우리는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여기' 에 존재할 수 있고, 또한 우리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지금/여기에 오롯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모든 소유 지향적 목표를 다 포기하거나 그것이 정녕 어렵다면 적어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옳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두려움과 욕망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유지향적 목표를 다 포기하거나 집착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소유해도 좋고, 소유하지 않아도 좋은 중립의 단계에 이른다.
그 중립 단계를 넘어서면 비로소 특정 행위를 자발적으로 하는 단계가 된다. 자발적으로 하는 단계라고 하니 의아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평소에도 우리는 많은 행위들을 자발적으로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착각이다. 평소에 우리는 자발적으로 하는 것보다 본능에 따라 하거나, 습관적으로 하거나, 필요에 의해서 하는 일들이 더 많다. 진정으로 자발적으로 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자발적 행위라는 것은, 자기목적적 행위라고도 하는데, 그 행위 자체가 즐거움이 되고 행복이 되는 행위이다. 소위 ‘당근과 채찍’이라는 외적 수단에 의해 유발되는 행위가 아닌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고 행위 자체가 목표가 되는 행위이다. 우리는 보통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싶다’한다. 그리고 그런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면 정말 열심히 자발적으로 할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비록 그 일이 평소에 하고 싶은 일이었다하더라도 돈을 번다는 소유지향적 목표를 달고 다니는 한 그저 돈을 벌기 위한 필요에 의해 하는 일일 뿐이다. 진정 자발적이 되려면 돈을 못 벌어도 그 일을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동일한 일이라도 소유지향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해내야 한다’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한다고 할 수 없다.
반면, 소유지향적 목표를 포기하면 어떤 행위를 통해 달성해야 할 목표가 없고, 그래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없으므로 어떤 행위던 ‘자발적’으로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이 단계에서 자발적으로 뭔가를 행하면 돈을 벌던, 아니면 다른 기회를 만나던 간에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우주는 보상을 한다. 그게 바로 동시성Synchronicity 의 원리이다. 동시성이란 심리학자 칼 융이 발견한 원리다. 융은 동시성을 ‘둘 혹은 그 이상의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여기에는 우연한 가능성 이상의 뭔가가 작용하고 있다.’고 정의했다. 가령, 문득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경우가 동시성의 흔한 사례이다.
동시성이라는 원리 때문에 소유지향적 목표 없이 행위 그 자체에 몰두하고 있을 때 우연치 않게 창발적 기회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조셉 자보르스키의 경우도 아무런 소유 지향적 목표 없이, 오직 미국의 차세대 리더들에게 진정한 리더십을 함양시킬 수 있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고자 하는 가치만을 추구하면서, 그 잘나가던 법률사무소를 그만 두고 나오자, 신비하게도 리더십과 관련된 수많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일일이 찾아서 연락을 한 것도 아닌데 우연치 않은 인연으로 수많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자발성의 단계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동시성이라는 자연의 섭리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발적 행위로 인한 모든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바로 수용의 단계이다. 대부분은 해피엔딩이지만 꼭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해피엔딩이 아니라 결과가 지독한 고통일지라도 받아들 수 있다. 국가가 엄격하게 금지 하는 데도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그로 인한 모든 박해를 받아들인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그 살아 있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