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이슈는 경영전략에서도 논쟁이 뜨겁다. 경영전략에서는 과거부터 조미니 스타일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를 의도된 전략(deliberated strategy)라고 한다. 미래를 예측하여 의도적으로 세운 전략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전략 컨설팅을 할 때는 이런 ‘의도된 전략 ‘을 만들어 주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는 ‘의도된 전략' 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 했다. ‘전략'이라는 것이 그 개념상 ‘의도적’으로 만들어 질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매우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경영사상가인 ‘헨리 민츠버그’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는 현실에서는 ‘의도된 전략'대로 전략이 실행되고 의도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경우(약 10%이하)가 많지 않다고 주장한다.
“전략은 조직에서 ‘수립‘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일련의 연구자들은 기업의 전략적이 방향 등이 기업 내부에 정해진 공식적인 ‘전략수립 및 기획 활동'에 의해서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보다는 많은 경우 최종 결과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우연히' 또는 ‘뜻밖에’ 발생하는 사소한 활동과 결정에서 전략이 자생적으로 생겨났고, 이런 작은 전략들이 합쳐서 기업의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는 이렇게 저절로 생겨나는 전략들을 창발적 전략(emergent strategy)라고 불렀다. 실제 기업의 전략은 의도된 전략으로 시작되지만 전략의 실행 중에 창발적 전략들과 결합하여 기업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경영학계에서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 이론으로 유명한 하버드 경영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도 현실에서 실제로 실행되는 전략은 처음부터 의도된 목표와 창발적 기회가 결합된 전혀 새로운 전략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그는 자신의 실제 경험을 생생한 사례로 들고 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대학을 다닐 때, 경영학 교수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월스트리트저널’의 편집인을 목표로 했던 그의 의도된 전략은 MBA 1년 차에 ‘월스트리트저널’ 인턴에서 탈락하면서 다른 창발적 기회들과 뒤섞이게 된다. ‘월스트리트저널’에 서는 떨어졌지만 명석한 학생이던 그는 최고의 경영전략컨설팅 회사에 인턴 자리를 얻게 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크리텐슨 교수는 우연치 않게 경영컨설턴트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월스트리트저널’의 편집인이 되겠다는 목표는 버리지 않았다. 경영컨설턴트로서의 경험도 자신의 의도적 전략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선택한 것이다.
성공적인 경영컨설턴트로서 5년을 보낸 뒤, 이제는 언론인으로서의 꿈을 펼쳐야겠다고 다짐했을 무렵 친구로부터 창업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자신만의 사업을 한다는 것도 흥분되는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성공하건 실패하건 나중에 ‘월스트리트저널‘의 편집인에 도전할 때 기업 을 창업하고 경영해본 경험이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흔쾌히 그 제안을 받게 된다. 또 한번 창발적인 기회가 의도적인 목표를 밀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벤처기업 창업자로서의 경력은 순탄치 않았다. 1987년 10월 주가 대폭락 사건(블랙 먼데이) 을 계기로 회사 경영은 어려워졌고, 그는 CEO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 즈음해서 그는 자신 의 스승인 하버드 대학의 교수로부터 교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안 받게 된다. 그에게는 창발 적 전략의 3단계 정도가 되는 셈이다.
비록 창발적이라고는 하나 그가 맞이한 기회들이 처음에는 유명한 전략컨설팅회사의 컨설턴트, 두 번째는 벤처 창업가, 그리고 세 번째는 하버드대 교수 등, 남들의 의도된 목표 못지 않은 것이니 누군들 선택을 주저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다소 부러움도 생긴다.
하지만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월스트리트저널 편집인'이라는 그의 의도적 목표는 창발적 기회들에 의해 이리 저리 밀려 다녔다. 따지고 보면 나의 사회 경력 역시 그런 경로를 따라 온 것 같다.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리스텐슨 교수의 경력에 비교할 바 아니지만 – 나는 하버드에서 교수 하라는 제안은 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 나도 대학 다닐 때는 ‘경영 컨설턴트’라는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고, 한창 컨설턴트 생활을 할 때도 그 이후 내 삶에 ‘중국 시장’이라는 카드패가 있는지 몰랐 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텐슨 교수의 결론은 내 심장을 관통한다.
“내가 계속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즐기는 한 나의 의도된 전략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창발적 문제나 기회의 흐름을 막지는 않았다. 내가 30년 전에 학계에서 사회생활을 마감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바로 코앞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크리스텐슨 교수는 이미 60대 중반을 훌쩍 넘었지만 그의 세 번째 창발적 기회를 ‘마지막’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삶에 대한 태도에 있다.
결론적으로 미래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통제하려고 하기 보다는 개인보다 더 위대한 존재- 그것이 신일 수도 있고, 우주를 움직이는 섭리일 수도 있다- 두려움과 욕망을 내맡길 때,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거나 또는 해소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은 우리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자연의 섭리에 의해 저절로 생겨난 기회에 ‘적응‘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내지 해소하는 것 을 의미한다.
‘동시성’이라는 주제를 다룬 ‘리더란 무엇인가?’의 저자 조셉 자보르스키가 이러한 내맡김을 직접 실험하였다.
자보르스키는 집안도 좋고, 학벌도 좋고 머리도 좋아서 미국 휴스턴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로 잘 나가던 금수저 변호사였다. 그러나 어느 날 아내의 갑작스런 이혼요구로 정신적 충격 을 받은 자보르스키는, 그 일을 계기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 그리고 보다 고차원적인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가 했던 첫 번째 조치는 자신을 통째로 ‘삶‘ 그 자체에 내던지고 삶이 자신을 관통하여 흐르도록 허락하는 실험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통제하거나 억지로 만들어 내지 않고 삶의 창조적인 기운이 나를 통과하여 움직이도록 내버려두는 자유‘를 배우기 위한 실험이었다. 그는 이혼 후 혼자서 여행을 하면서 ‘내맡김 실험‘을 실행한다.
“우주의 펼쳐짐에 참여하려면 삶을 통제하려 하기 보다는 삶이 우리를 통과하여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어야 만 한다. 나의 평소 방식은 이와 정반대였다. 특정 목표를 세우고, 목표 달성을 위하여 그야말로 전투적으 로 매진하고, 필요한 무엇이든 해서 ‘그것이 일어나도록 만든다.’ 이것이 과거 내 방식이었다. …… 그러나 지금은 믿음과 인내심을 갖고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에 나를 맡겨보는 실험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호기가 오면 붙잡는 그런 실험이었다.”
그는 이 실험을 하면서 우연치 않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인생의 귀중한 교훈들을 깨닫게 된다. 그들이 학식과 경험이 많은 훌륭한 스승이어서가 아니고 짧은 순간의 만남이지만 서로 마음이 통했기 때문에 서로에게 심오한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였다.
“우리가 삶과 삶의 모든 가능성에 마음을 열고, 삶의 다음 단계를 주어지는 그대로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 중요한 도움을 주는 훌륭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세상을 통제하려 하지 말고, 세상이 나를 관통하도록 내버려두라’는 말이 가슴에 강하게 각인된다. ‘이로 인해 다소 위험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온전한 내맡김으로 세상이 자신을 관 통하도록하라.’ 갑자기,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라는 러시아 시인 푸쉬킨의 싯구가 떠오른다. '삶이 그대를 관통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라' 이렇게 바꾸고 싶어진다.
우주는 위대한 존재이다. 수십억 년 동안 자신의 섭리대로 우주를 잘 운영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비록 우주의 섭리가 인간을 이롭게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섭리에 의해 지금도 헤아릴 수 없는 경이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바로 이런 거대한 힘 앞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처럼 날마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덤벼든다.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생명의 작용이 온 우주를 창조하고 보살펴주고 있을진대, 내가 힘을 쓰지 않으면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생기지 않을 것같이 생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