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과 반응을 얘기하려면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빅터 프랭클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으로 유명한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도살장으로 알려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정신과 의사이다.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으로 유명한 자기 계발 작가 스티븐 코비는 빅터 프랭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어느 날 그가 작은 감방에 홀로 발가벗겨진 채로 있을 때 자신이 후에 나치마저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인간이 가진 가장 마지막 자유’라고 명명한 상태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나치는 그의 주변 환경 전체를 통제하고 원하는 대로 그의 육체를 다룰 수 있었지만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상태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수용소의 모든 일들에서 영향을 받고 안 받고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의식 수준에 도달했던 것이다. 즉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자극과 그것에 대한 반응 사이에서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즉 권한을 확보했던 것이다."
세상사는 단순화시키면 외부의 ‘자극’과 그에 대한 내부의 ‘반응’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비단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짐승은 특정 자극에 대해 본능에 프로그램된 대로 반응한다. 그래서 인간은 짐승들이 아무리 덩치가 크고 사나워도 어떻게 반응할지를 미리 알 수 있기 때문에 짐승들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짐승만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들도 본능이나 그 보다 좀 더 진화한 사회문화적 프로그램대로 반응한다.
내 경우를 봐도 그렇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어떤 일이 발생하면 거기에 따라 곧바로 감정이 올라온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좁은 것이다. 다만 과하고 격한 반응이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어쨌든 나이가 들수록 자극에 따라 곧바로 감정적 반응이 나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럴까?
가령 아랫사람이 통제를 따르지 않으면 곧장 분노가 올라온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첫 번째, ‘나는 왜 아랫사람들에게는 통제력을 행사하고자 하는가?’이다. 통제하려는 것은 일종의 욕망이다. 남을 통제하면 스스로 힘이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내게 힘이 있다는 뿌듯한 존재감을 즐기기 위해서 그러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은, ‘그 존재감이 무시당하면 왜 분노가 일어나는 걸까?’이다. 이것이 ‘자극과 반응’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질문이다. 존재감이 무시당하면 단순한 분노 정도가 아니라 살인까지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길거리에서 사소한 다툼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사건이 뉴스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대부분 범인들은 ‘상대(피해자)가 자신을 무시해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요즈음 그런 사건을 사회에 만연한 ‘분노조절장애’ 현상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단순히 분노가 조절되지 않는 것만을 사건의 원인으로 보기에는 뭔가 부족한 것 같다. 분노 자체가 너무 크고 또 폭발적이다. 왜 그런 살인적 분노가 폭발할까? ‘존재에 대한 무시’ 이면에 뭐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꾸로 돌려 생존조차 보장받기 어려웠던 거친 원시의 시대로 가야 할 것 같다. 원시 부족사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무시당한다는 것은 동료들에게 따돌림당하고 결국 무리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맹수들이 들끓는 들판으로 쫓겨난다는 것은 바로 죽음 속으로 내쳐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를 무시당하는 사람들은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직면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두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두려움에 주눅이 들어 굴복하거나 아니면 두려움을 극복하기 의해 분노라는 또 다른 감정적 에너지를 활용하게 된다. 무시라는 자극에 분노로 반응하는 것에는 그런 오래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심리적 프로세스가 무의식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사람들은 자신에게 왜 살인적 분노가 갑자기 폭발하는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만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제대로 통제되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극을 인지하고 난 후 반응이 일어나는 동안 그 사이를 지배하는 것이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무시에 대해 이성은 나의 권한이 침해당했다는 정도로 해석을 하지만 무의식은 훨씬 더 거칠고 과도하다. 사소한 권한 정도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가 죽음의 위협에 직면했다고 인식한다. 그러면 거기에 합당한 신체적 변화가 일어난다. 식은땀이 흐른다거나 입 안이 바짝 마른다거나 하는 증상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다음 신체적 변화에 상응하는 정서적인 감정이 형성된다. 무의식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고 의식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분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이 지배하는 과정을 인간은 느끼기 못한다. 그래서 ‘무시’라는 자극에 ‘분노’라는 감정이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있는 무의식은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무의식이 자극을 해석하는 것에 의식이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무의식이 아직도 원시시대의 거친 사바나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극에 대해 과격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 사회에서는 누군가가 나를 무시했다고 해서 나라는 존재를 무리에서 쫓아낼 수 없다. 설사 무리에서 쫓겨난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 말은 누군가가 나를 무시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나의 생명을 위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이란 놈은 아직도 맹수들이 들끓는 거친 사바나를 뛰어다니고 있기 때문에 문명인답게 생각하지 못한다. 오랜 세월 진화를 통해 생긴 무의식은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시 사바나 시대에 그냥 머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무의식이 그런 과격한 해석을 하는 데도 이것을 타이를 방법이 없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역치하閾値下수준에서 과거의 데이터를 재구성하여 해석을 내리는 것이니 거기에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무시라는 자극에 분노하는 것은 원시인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진화의 힘을 쉽게 이길 수 없다. 거친 원시시대에는 무시하는 상대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들보다 분노를 느끼고 저항한 사람들이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았을 것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유전자가 계속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므로 지금 생존해 있는 현대인에게도 무시라는 자극에 분노라는 반응을 명령하는 유전자가 우세할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원시시대를 살고 있는 무의식이 해석하는 대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친 사바나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몰라도 이제는 그렇게 무의식이 해석한 대로 반응하게 되면 현대 사회에서는 그저 ‘덩치 크고 사나운 짐승'처럼 취급받을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고립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가만히 지나온 내 삶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외부의 자극과 내부의 반응 사이에서 결정되었음을 문득 깨닫는다. 가정, 학교, 군대, 회사 등 내가 속했던 집단으로부터 받은 여러 가지 긍정적, 부정적 자극들과 거기에 대한 나의 반응이 결국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내가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무의식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니, 참 믿기가 어렵다. 나는 그동안 나의 의지대로 내 삶을 펼쳐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원시 사바나 지대를 뛰어다니는 천둥벌거숭이가 같은 존재가 나의 삶이 만들어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삶은 지나간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앞으로 나의 삶을 부정적 감정이 프로그램 한대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바로 자극과 반응 사이에 있는 천둥벌거숭이 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의식이 해석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는 의식의 힘을 길러야 한다. 즉 무시라는 자극에 대해 무의식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석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분노로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이런 힘이 있으면 세상의 자극에 대해 남들과 다른 반응을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말을 들어 보자.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나 미래와 조화롭게 사는 사람들, 한마디로 소위 ‘행복한’ 사람들은 보통 스스로 만들어낸 원칙에 따라가는 이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일정에 따라 밥을 먹고, 졸릴 때 잠을 자고, 일이 즐거워서 일을 하고, 합당한 이유로 친구와 만난다. 동기와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작으나마 선택의 자유를 얻어냈고, 자신을 위해서는 큰 것을 원하지 않는다. …… 유전자나 문화나 에고가 시키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이기적이다. 이들이 어떤 일을 하는 까닭은 삶의 도전을 즐기기 때문이고 삶 자체를 즐기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순리의 일부라고 느끼고 조화로운 성장을 추구한다.”
여기서 말하는 ‘유전자나 문화나 에고가 시키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자극을 무의식에 프로그램된대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들은 세상이 유전자나 문화 그리고 에고에 새긴 원칙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만든 원칙에 따라 반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빅터 프랭클이 시체들을 태우는 매캐한 냄새 가득한 아우슈비츠의 어둡고 축축한 감방에서 스스로 터득한 힘이다.
‘그렇다면 무의식의 영향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실천적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은 자극과 반응의 원칙을 알게 된 후 수년간 고민하던 주제이다. 이를 명쾌하게 정리해준 사람을 나는 아주 엉뚱한 곳에서 만났다. 바로 청나라의 리쭝우라는 사람이다.
리쭝우는 청나라 시대 변방의 학자였는데 면후심흑面厚心黑이라는 네 글자로 유명해졌다. 면후심흑은 중국 역사에서 내로라하는 영웅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집약한 것이다. ‘두꺼운 얼굴과 검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언뜻 부정적 의미인 듯 하지만 그 본질을 살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면후는 ‘파렴치하거나 뻔뻔함’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다. 자신에 대한 효능과 가치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타인의 호평이나 혹평에 흔들리지 않는다. 즉 세상의 자극을 막는 방패인 것이다. 반면, 심흑은 ‘음흉하고 남을 속임'이 아니라, 무궁무진한 비정형, 즉 일정한 형체가 없이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마음이다. 바로 특정 자극에 대해 새로운 반응을 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바로 심흑인 것이다.
자극에 대한 무의식의 해석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지만 자극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면후)과 무의식의 해석에 대해 의식이 다르게 반응하는 것(심흑)은 자유의지로 가능한 부분이다. 그래서 ‘아무도 당신의 동의 없이 당신에게 고통을 가하지 못한다'는 엘리노어 루스벨트(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나, ‘우리가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우리의 자존을 빼앗을 수 없다'는 간디의 말이 가능한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자극도 ‘면후’로 방어하여 흔들리지 않거나 기어이 ‘면후’를 뚫고 들어온 자극에 대해서는 그저 무의식이 처리하도록 놔두지 않고 ‘심흑’이라는 창을 통해 차별화된 반응을 할 수 있다면 자극과 반응 사이에 훨씬 넓은 선택의 공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면후와 심흑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당연히 뒤를 이어 이런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한 답은 너무나 명쾌하다. 면후와 심흑은 자신의 의식 수준을 진화시켜야만 가능하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이론처럼 분노나 자부심, 그리고 두려움, 욕망 등을 초월하여 용기, 중립, 자발성, 수용 단계로 올라가면 갈수록 더욱 강력한 면후심흑을 장착할 수 있는 것이다. 리쭝우도 가장 높은 수준의 면후심흑은 노자나 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클수록 우리의 삶은 자유로워지며, 그 공간은 면후와 심흑이 만든다. 그리고 면후와 심흑은 의식 수준의 진화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이것은 빅터 플랭클과 리쭝우, 그리고 데이비드 호킨스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나의 두뇌 속에서 조우하며 만들어 낸 놀라운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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