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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지향적 삶

Written by 이건호 | 19년 6월 30일

그러나 존재지향적인 삶은 다르다. 행위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므로 행위를 하는 순간 목표가 이루어지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더 강력한 것은 본질적인 목표 외에 부차적인 목표도 쉽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에 몰입하면서 행위 그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는데 집중하는 삶을 산다면, 가령 승진이나 사업 성공 등 승리와 성과로 대변되는 소유지향적 목표가 달성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직접적으로 돈을 벌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돈이 저절로 벌린 다는 얘기다.

마이클 싱어는 미국의 작가이자 명상지도자이다. 게다가 그는 건축업자, 프로그래머, CEO 등 수많은 성공적인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이쯤 되면 매우 많은 목표를 세우고 달성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이 '무엇을 가지겠다'는 소유지향적 목표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어렸을 적 우연한 경험으로 인해, 20대부터 숲 속에서 명상하면서 혼자 지내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살기 위해 숲 속에서 혼자 명상하면서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따로 계획 하지 않았다.

 

대신 그저 흘러가는 거대한 흐름 속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기로 하고, 삶이 어떤 제안을 하던 자신의 좋고 싫음에 관계 없이 삶이 내미는 손을 잡겠다고 다짐한다. 물론, ‘자신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봉사한다’는 가치 즉, 올바른 방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어긋나는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추구하는 방향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한 인생의 갈림길- 자신의 원하는 길과 삶이 제시하는 길- 에서 늘 삶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 갔다. 매번 위대한 흐름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해하며 말이다.

처음에 삶은 그를 명상에 관심을 가진 공동체의 지도자로 이끌었다. 그러더니 어느새 삶은 인도의 유명한 영성 구루들을 초대하여 세미나를 여는 영성센터의 리더가 되도록 그를 이끌었다. 그 뿐이 아니다. 영성센터가 숲 속의 소박한 오두막들로 이루어진 곳이고 모든 오두막을 마이클 싱어와 그의 동료들이 직접 지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삶은 그를 우아한 집을 짓는 건축업자로 이끌어 갔다. 그가 스스로 뭔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삶에 개입한 것 아니라 삶이 그에게 손을 내미는 매 순간, 그는 그저 그 손을 잡고 따라갔다.

그는 오직 '지금/여기'에 존재하며 삶이 제시한 길을 가는데 필요한 행위 자체를 즐겼다. 초보자들을 위해 명상을 가르치는 행위, 자신이 만나고 싶었던 인도의 요가 구루들을 초청하여 세미나를 개최하는 행위, 자신이 살고 있는 오두막처럼 숲과 조화를 이루는 오두막을 짓는 행위 등 모든 것들을 그 자체로 즐겼다. 미래에 대한 어떤 목표도 없었기에 두려움과 욕망이 없이 오직 파도의 물마루 같은 현재의 매 순간에 존재했다.

그런 존재지향적 삶을 사는 동안 그에게는 부와 명예와 권력도 함께 주어졌다. 건축업을 시작하고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고, 그 이후 프로그래머, CEO 등을 거치며 명예와 권력도 생겼다. 굳이 그런 것들을 쫓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지만 그에게 필요한 이상의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주어진 것이다. 소유지향적 사람들은 그렇게 원하던 부와 명예, 권력이 주어지는 그 때부터 소유욕이 더욱 강해져서 결국은 파국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목표를 달성하기 전보다 정작 목표를 달성한 이후가 더욱 위험해진다. 그러나 존재지향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 들은 필요한 최소한의 부와 명예와 권력만을 원할 뿐, 그 이상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진화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존재지향적인 삶의 사례로 마이클 싱어처럼 성공한 – 사회적 잣대로 봤을 때-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결코 녹록하지 않은 환경에서 평생 거친 노동을 하면서도 '존재지향적 삶'을 누리는 사람 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을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자기 목적적 노동자‘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알프스의 작은 부락에서 평생을 산 세라피나라는 할머니의 사례이다.


할머니의 일상은 시골 할머니들이 대게 그렇듯이 새벽 일찍 시작된다. 알프스의 작은 부락에서 할머니는 평생을 소젓을 짜고,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하고, 가축과 자손을 돌보며 살았다. 그리고 그런 패턴은 그녀의 생애 대부분에 걸쳐 똑같이 반복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동일한 패턴의 일상에 질려서 자신이 사는 그곳을 지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라피나 할 머니를 비롯하여 비슷한 연령-조사 당시 66-82세 사이-의 노인들은 그런 생활에 너무나도 만족하며, 고요한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고 말했다. 이들은 도시 생활의 편리성을 몰라서 그랬던 것인가? 아니다.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TV나 신문 등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또 대부분 친척들이 대도시에 살고 있어서 아파트, 자동차, 문화적 삶 등 유럽의 현대적 생활방식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면 이들이 이미 나이가 든 노인들이어서 그랬던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노인들의 자식들인 4-50대들도 이들 노인들과 비슷한 삶의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다만 2-30대의 손자 뻘 되는 젊은 이들은 시골을 벗어나 도시로 나가고자 하는 욕망과 기대가 강하였다. 아무래도 인생 전반기, 산 꼭대기를 정복하려는 젊은이들이라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기 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한 욕망을 참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를 넘긴 대부분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즐기는 방향으로 진화되었다는 것이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결론이다.

알프스의 작은 부락이라고 해서, 알프스를 단지 아름다운 관광장소로만 여기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일상생활이 풍광처럼 늘 한가롭고 평화로울 것이라 지레짐작하면 큰 오산이다. 사실 알프스의 삶은 결코 쉽지 않다. 매일매일 생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고된 단순노농에서부터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다양한 작업까지 한 사람이 광범위한 분야를 숙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고된 노동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우울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되고 반복적인 노동 자체를 즐기기까지 한다.

"나는 자유롭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나 할 수 있으니까요. 내가 만일 어떤 일을 오늘 안 하 면, 내일 하면 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죠. 나는 여태껏 내 자유를 지켜 왔고, 이 자유를 위해 싸웠습니다."

조사 당시 74세 였던 세라피나 할머니의 당당한 인터뷰 말씀이다. 이 사례를 통해 고되고 반복적인 노동으로도 ‘존재지향적 삶’을 이룰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세라피나 할머니는 커다란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인터뷰에서 강조했듯이 그 세가지를 합친 것보다 더 귀중한 '자유'를 획득하였고 이를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었다.

 

 

인도의 위대한 영적 스승인 '스리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는 '사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궁극적 목적' 이라고 했다. 무엇을 가지는 것, 무엇이 되는 것, 무엇을 행위 하는 것보다도 그저 '사는 것' 또는 '존재 하는 것' 자체가 삶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이다.

올림픽 때면 항상 한국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종목이 있다. 바로 '양궁'이다. 이 양궁이 존재지향적 목표를 추구할 때 소유지향적 목표 역시 달성되는 좋은 사례이다. 궁사들은 올바른 방향을 선택하여 과녁을 겨냥하기는 하지만 결코 과녁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상대보다 점수가 앞서고 있건 뒤지고 있건 관계 없다. 그 다음 그들이 집중하는 것은 오로지 활을 당기는 것과 화살에서 손을 떼는 지금 이 순간의 행위뿐이다. 화살을 날리는 그 행위 자체에만 극도로 집중한다. 화살에서 손을 놓는 그 찰나와 동작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러면 화살은 우아하게 날아서 결국 과녁의 중심 을 꽂힌다.

존재지향적 목표는 올바른 방향을 선택하여 활을 당기고 화살을 놓는 행위이고, 과녁의 중심은 소유지향적 목표일 뿐이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존재지향적 목표는 행위 그 자체를 통해 현재 의 순간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무엇이든 소유지향적 목표인 승리와 성과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