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과 품질은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다시 말해 제품의 품질을 올리면 당연히 원가가 더 들어가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진다. 또 가격을 싸게 하면 품질도 그만큼 낮아진다. 이를 다른 경쟁사와 비교하여 ‘상대적 경쟁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둘의 상관관계가 보인다. 다른 조건이 경쟁사와 같을 때 품질만 더 높다면 ‘품질경쟁력’이 올라간다. 반대로 다른 조건은 다 경쟁사와 동일한데도 가격만 더 싸다면 ‘가격경쟁력’이 올라간다. 경쟁상황을 단순화하여 시장에서 동일한 제품을 만들어 내는 두 경쟁사가 가격과 품질만 가지고 경쟁을 벌인다고 하자. 품질 경쟁력을 올리면 올릴수록 가격 경쟁력은 낮아지게 되고, 반대로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자 하면 품질 경쟁력은 낮아지게 된다.
이렇게 가격과 품질 경쟁력처럼 하나를 움직이면 다른 하나가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는 관계를 트레이드오프 trade-off 관계라고 한다. 세상에는 가격과 품질뿐만 아니라 ‘트레이드오프 관계’에 있는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이렇게 어떤 두 개의 요소가 트레이드오프 관계에 있다면, 경쟁상황에서는 그 두 개의 요소를 동시에 확보하기 어렵다. 실력이 대등한 경쟁자들끼리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는 한 회사가 가격경쟁력과 품질경쟁력을 동시에 가지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렇게 한 회사가 모든 경쟁력을 독식하게끔 다른 경쟁사들이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이런 트레이드오프 관계가 깨지는 상황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가령, 가격이 제일 싸면서 품질도 다른 기업들보다 제일 높은 기업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경영학에서 '아웃 페이싱(Outpacing)' 전략이라고 한다.
과거 1980년대 일본 기업이 자동차와 가전산업에서 이런 업적을 남겼다. 그 당시 일본 기업들이 만든 자동차와 가전제품은 품질과 디자인은 물론이고 가격 면에서도 미국 기업들을 능가하였다. 다른 경쟁사들에 비해 가격과 품질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한 것이다. 이런 기업들이 출현하면 다른 경쟁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시장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품질도 제일 좋은데, 가격도 제일 싸다면 어떤 고객이 그 제품을 사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굉장해 보이는 아웃 페이싱 전략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다른 기업들이 필사적으로 이를 모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구 상 존재하는 그 어떤 생명체보다 모방에 능하기 때문에 모방하고 싶은 것들은 언젠가는 기어이 모방하고 만다. 경쟁자가 모방하면 할수록 그 방식은 상대적 우위를 창출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80, 90년대에는 일본 기업을 보고 배운다, 즉 일본 기업을 대놓고 모방한다는 의미로 ‘벤치마킹(benchmarking)’ 용어가 생길 만큼 미국 기업을 비롯한 전 세계 기업들이 일본을 배우기 위해 온통 난리를 피웠다. 결국 그렇게 모방을 당했기 때문에 당시 당대 최고 기업으로 군림하던 일본 기업들은 지금 이름만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 어떤 전략이 모방당하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모방이 어려운 것들은 기어이 모방당하고 만다. 정작 모방당하지 않는 것은 모방이 어렵거나 쉬운 차원이 아니라 모방의 동기를 주지 않는 것이다. 가격과 품질에서 모두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즉 트레이드오프 법칙을 극복한 경영방식은 누구나 탐을 낼 수밖에 없다. 망설이고 말고 할 이유가 없다. 할 수 있다면 당연히 따라 할 것이다. 아니 지금은 할 수 없어도 언젠가는 모방할 것이다. 동기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격만 싸거나, 품질만 좋거나 양자택일을 하면 경쟁자들은 그것을 모방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적어도 무조건 따라 하지는 않는다. 양자택일을 한 방식은 아무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모방의 동기를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략에서 트레이드 오프라는 법칙은 결코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트레이드오프가 있기 때문에 ‘차별화’라는 것이 생길 수 있다. 그렇기에 ‘트레이드오프’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대가 모든 방면에서 압도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영원히 유지할 수 있다면 굳이 트레이드오프 법칙을 이용할 필요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조건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기보다, 경쟁자의 모방 동기를 줄이기 위해서 어디에 더 집중할 것인지를 잘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전략적 선택’이다.
우리네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삶은 사업과는 달라서 트레이드오프 관계에 있는 것들을 다 잘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모방한다고 해서 나의 행복을 빼앗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드오프 관계에 있는 것들을 다 잘하겠다는 자세는 삶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사람들은 여가를 즐기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조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소위 출세도 하고 싶어 한다. 이 문제는 인생의 자유와 권력이 트레이드오프 관계에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어떤 이들은 그 둘 다를 가질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논리적인 모순이다. 왜냐하면 권력에는 항상 책임과 의무가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책임과 의무를 치르지 않는다면, 올바른 권력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오래갈 수 없다. 그것은 부작용을 일으켜 자유마저 빼앗아 간다. 그렇게 되면 자유도 권력도 가지지 못하는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가령, 웬만한 중견기업을 일구어서 부, 명예, 권력도 다 가졌는데, 회사의 오너이다 보니 시간도 자유로운 사람을 생각해보자. 이 사람은 조직의 정점에서 권력과 자유를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의 명예와 권력 뒤에 버티고 있는 책임과 의무의 거대한 그림자가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권력이 없는 사람보다 진정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리가 자유와 권력을 다 누릴 수 있다면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들 때문에 그 자리의 주인은 항상 자주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굳이 경쟁자가 아니라도 요즈음 권력에 걸맞게 책임과 의무를 다 하는지 감시하는 사회적 감시시스템으로 인해 결코 트레이드오프 관계에 있는 권력과 자유를 다 가지기 어렵다.
그러니 굳이 트레이드오프 관계에 있는 것을 다 가지려 욕심낼 필요 없다. 한 순간 그렇게 할 수 있다 해도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대신 하나를 양보하고 자신에게 상대적으로 더 귀중한 하나를 선택하라. 사업에서 던 삶에서 던 경쟁에서 자유로운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런 길이 자신의 타고난 본성과도 어울린다면 우리는 그 길을 '생태적 틈새'라고 부를 수 있다.
‘생태적 틈새 (Ecological niche)’라는 개념은 오래전 러시아의 생물학자인 가우스가 발견했다. 한 생물이 차지하는 서식지 또는 먹이사슬 내에서의 지위를 의미한다. 간단하게, 어떤 생물이 ‘어떤 지역에서 어떤 먹이를 먹고 어떤 방식으로 사는가?’를 말한다. 생태적 틈새는 먹이와 같은 생존에 필요한 자원이 충분치 않은 조건 아래서 두 개의 종은 같은 방식으로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것도 일깨워 준다. 적어도 서식지를 분할해서 근근이 살거나 아니면 사는 방식을 달리함으로써 공멸을 피할 수 있다. 후자와 같이, 소모적 경쟁을 피해 각자 자신의 본성과 기질에 맞게 ‘분화(分化)’함으로써 획득하는 것이 바로 '생태적 틈새'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작은 동산이 있다. 동산은 비록 작아도 한 바퀴 돌면 제법 땀이 흐른다. 나는 늘 생각이 복잡하고 어지러울 때는 그 작은 동산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걷는다. 산이 ‘ㄷ’ 자로 되어있는데 능선을 따라 걷다가 작은 계곡 속에 있는 숲으로 들어가면 도롱뇽이 사는 아주 작은 연못도 있다. 연못이라기보다는 그냥 물구덩이일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 너무나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작은 생태계를 이루면서 말이다. 서울 변두리 동네 작은 동산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생태계를 이루고 산다. 도롱뇽은 잘 보이지 않지만 -사실, 한 번도 본 적은 없다- 도롱뇽은 분명 거기에 있다. 자신만의 생태적 틈새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동물이건 사람이건 자신의 생태적 틈새를 벗어나면 아무래도 고생이다. 몸도 마음도 다 고생이다. 그래서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생겨 났는지도 모른다. 거기서 '집'이란 '생태적 틈새'로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의 생태적 틈새를 벗어나면 몸과 마음이 고생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혹자는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그런 고생을 통해 삶의 지평을 넓혀 가고 다른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생태적 틈새란 생태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영역을 의미한다. 지평을 넓히고 다른 영역을 개척하는 것도 그 생태적 틈새 안에서 하면 더욱 행복해진다. 생태적 틈새라고 해서 우리 동네 도롱뇽 연못처럼 늘 작은 공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넓디넓은 광활함은 없더라도 어느 생태적 틈새나 깊이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마음만 먹는다면 생태적 틈새에서 깊이 있게 살 수 있고 또 위대해질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택한 주제에 대해 심도 깊은 연구를 하고, 이를 통해 그 주제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깊이 있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 다 커서 개미에 관심을 가지면 다들 ‘쓸데없는 짓’이라 손가락질하기 쉽다. 그러나 그 사람이 10년간 개미만 연구한다면 개미에 대해서는 다들 대가라고 인정할 것이다. 개미처럼 하찮은 미물에 대한 관심이라도 남들의 예 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깊이 있게 판다면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도 베르베르와 같은 대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해도, 즉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지 못한다 해도 자신에게 맞는 '생태적 틈새' 속에 존재한다면 적어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다. 사바나의 고혹한 킬러 표범도 힘들여 잡은 먹이를 사자나 하이에나 무리에게 빼앗기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표범은 잡은 먹이를 자신만의 세계인 나무 위로 가지고 가는 습성이 있다. 나무 위라는 생태적 틈새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표범에게서 먹이를 빼앗아 갈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남의 생태적 틈새에 가서 주눅 들고 두려워하면서 산다. 왜 그럴까? 아마도 자신의 생태적 틈새를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안다 해도 그 생태적 틈새가 사회적 기준으로 봐서 초라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연못 속 개구리'를 우습게 안다. 그 보다는 ‘창공을 누비는 독수리’를 선망한다. 사회적 잣대로 보면 독수리는 개구리에 비해 모든 면에서 절대적 우위를 가진다. 하지만 '창공을 누비는 독수리'가 '연못 속 개구리'보다 반드시 행복할 것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연못이 인간의 관점에서는 좁은 세계이지만 개구리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생태적 틈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못 속에서라면 개구리는 독수리에 비해 더욱 뛰어난 경쟁력을 가진다. 그러므로 개구리는 독수리를 존중할 수는 있어도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존중은 하지만 부러워하지 않기에 개구리는 독수리와 자신을 비교할 필요 없다. 그들은 그들의 세계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살고 개구리는 그의 세계에서 그렇게 살면 된다. 독수리의 세계는 개구리의 세계보다 넓고 크다. 하지만 개구리는 그렇게 넓고 큰 세상은 필요 없다. 그저 작은 연못이 개구리가 가진 세상의 전부일 수도 있지만 그 연못이 개구리에게는 우주인 것이다
이런 저성장과 불확실성의 시기가 지속되면 산업자본주의가 추구하던 속도와 획일성 같은 가치가 무너지면서 민첩성이나 다양성 같은 가치가 중시될 것이다. 고속으로 질주하던 큰 도로가 막히면 결국 차들은 작은 국도로 접어들어 돌파구를 모색하게 되는 이치와 같다. 우리 동네만 해도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들이 동네 상권을 장악하다가 최근에는 케이크이나 독일빵 등에 특화된 개인 빵집에게 시장을 조금씩 잠식당하고 있다. 카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과거 같으면 카페가 들어설 자리가 전혀 아닌 곳에 작은 카페가 들어서서 색다른 맛의 커피로 고객을 유혹한다. 별다방, 콩다방으로 대변되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보다 훨씬 고즈넉하다. 이런 현상이 긍정적 방향으로 심화되면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개인들이 각자의 생태적 틈새를 찾아 들어가고 그런 생태적 틈새들이 모여 유기적인 생태계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Ecological Niche, 생태적 틈새란 말이 왠지 정감 있게 들린다. 'Ecological'에서 eco라는 어두는 '집안 전체'를 뜻하는 그리스어 oikos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생태적 ecological'이라는 말은 자기(ego) 중심에서 우리 모두, 전체(eco) 중심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내포하고 있다. 틈새란 나만을 위한 틈새가 아니라 우리 모두, 세상 전체를 위한 나의 틈새이다.
자연의 섭리는 '약육강식'이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이론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다윈이 찾은 자연의 섭리는 ‘적자생존’이다. ‘나는 이 변화하는 세계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이 질문은 다시 말해 ‘어떤 생태적 틈새를 찾아갈 것인가?’ 일 것이다. 경제가 저성장 기조에 들어가고 미래의 불확실성이 커진 이 시점에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질문이다. 당장은 일자리와 돈타령을 하겠지만 그런 것들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좀 더 본질적인 것을 찾을 것이다.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강한 것이야'라는 말은 농담 같아도 진리 중에 진리이다. 트레이드오프 관계에 있는 것까지도 다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먹이사슬의 꼭대기로 올라간다고 반드시 오래가는 것은 아니다. 정치권이나 혹은 대기업의 맨 윗자리에 올랐다가도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추락하는 사람들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무조건 먹이사슬의 꼭대기를 추구하기보다는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자신에게 맞는 생태적 틈새를 찾는 자가 진정한 강자가 아닐까 하는.
그러므로 우리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믿음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제 내가 개구리이거나 토끼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리고 그들이 독수리나 호랑이인 것을 부러워하지도 말자. 우리는 다만 각자에게 맞는 생태적 틈새를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사회도 건강한 생태계를 조성할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과 사회의 행복은 각자가 자신의 생태적 틈새를 찾는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야 나머지도 다 잘 풀린다.
명심하라, ‘트레이드오프’는 자신의 생태적 틈새를 찾기 위해 반드시 따라야 할 중요한 자연의 섭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