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아마도 ‘필연(必然)과 우연(偶然)’ 그리고 거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행동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는 것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한국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필연적 요소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뿐만 아니라 소위 금수저 물고 태어나느냐, 흙수저 물고 태어나느냐 즉 부자인 부모를 만나느냐 가난한 부모를 만나느냐는 우연적인 것이지만 그 이후의 삶은 부모의 재력에 따른 필연적 요소들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필연’이 삶 전체를 지배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사람의 미래는 사실상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 위대한 통제자의 의지에 따라 삶의 방식과 결과가 이미 정해진 것처럼 말이다. 필연에 의해 평생을 부와 명예와 권력을 쥐고 산다 해도 이렇게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이 정해진 삶이라면 결코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소나 돼지, 닭과 같은 가축의 삶은 거의 필연적 요소에 의해 미래가 결정된 삶이라 할 수 있다. 탄생의 목적부터가 인간의 식량으로 활용되는 것이라 태어나서 도축될 때까지 그들의 삶은 마치 기업의 제품 생산부터 출시 프로세스처럼 정형화되어 있다.
‘필연’만으로는 재미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는 ‘우연’도 있는 것이다. 살면서 우연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지금 그대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 또는 ‘그녀’를 어디서 우연치 않게 만났는지. 태어나기 전부터 그대의 짝이 정해졌을리는 만무하다. 물론 “온 우주를 통틀어 ‘우연’은 없다” 라는 말처럼 인간의 관점에서는 우연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미리 정해진 필연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은 신의 관점에서 필연인 것이다. 나는 인간의 관점에서 ‘우연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삶 전체가 우연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 경우는 있을까? 왜 없겠는가, 마치 망망한 바다에서 파도에 마구 흔들리는 작은 쪽배 같은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과학과 기술, 법률과 정치제도 등 문명이 발달하기 전의 세계에 살던 사람들은 오늘날보다 우연에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동물의 경우에는 가축과 달리 야생 동물들은 필연보다 우연에 더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산다.
마지막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필연과 우연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다. 이 대응은 본능적인것과 의지적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본능적 대응은 생물적 유전자에 프로그램화 된 대로 대응하는 것이다. 위험이 닥치면 도망가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아 먹는 등, 주로 생존과 직결된 동물적 대응이다. 반면 의지적 대응은 주관적 의식에 의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하는 것이다.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예측하고 미래 환경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인간은 이러한 의지적 대응으로 인해 다른 생명체보다 열악한 신체적 조건임에도 생존은 물론이고 문명의 발달도 이룰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의지적 대응이 전체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는 어떤 것일까? 아마도 필연이건 우연이건 어떤 환경적 변화나 외부적 자극에도 괘념치 않고 오롯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경우일 것이다. 이 정도 되면 거의 해탈에 이른 경지이다.
그대나 나 같이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보통 인간들의 삶은 ‘필연, 우연, 대응’ 이 세 가지 요인 들이 골고루 섞이기 마련이다. 이 중 필연은 이미 정해진 것이니 미리 알 수 있다. 의지적 대응 역시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높으냐 낮으냐, 전략적 지혜가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어차피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대응이니 그것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우연만은 미리 알 수 없다.
신은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우연치 않게 나타나는 사건사고를 미리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에는 우연으로 인한 영향이 큰 비중을 차지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우연적 요소를 ‘운(運)’이라고 부른다. 누구는 ‘운’이 좋고 누구는 ‘운’이 나쁘 다라고 할 때, 운이란 필연적인 것도, 의지적 대응도 아닌 우연적인 사건사고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운(運)’이라는 것이 비록 우연적인 것이긴 해도 마냥 무작위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운에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주변에는 늘 행운이 따라 다니는 것 같은 사람들이 한 두 명 있을 것이다. 돈도 많이 버는 데 자식들도 공부를 잘해서 별다른 문제 없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등, 딱히 죽어라 노력하는 것도 아닌데 하는 일마다 술술 풀리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반면에 ‘지지리 복도 없는’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한 사람들도 주변에 늘 한두 명 정도는 있을 법 하다. 우연치 않게 병이 들어 회사를 그만 두었는데, 업친데 덮친 격으로 저축해둔 돈을 사기 당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는 늘 행운이 붙어 다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늘 불운이 붙어 다닌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착각일 뿐이다. 통계적으로 볼 때 행운과 불운은 평균으로 회귀한다. 어느 기간에는 불운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킬듯 하지만 또 세월이 지나면 행운이 찾아온다.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한 고사 성어가 바로 새옹지마塞翁之馬인 것이다. 특별히 운이 좋거나 특별히 운이 나쁘거나 한 경우는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 다음엔 반대 경우가 생길 확률이 높다. 이것이 바로 ‘평균 회귀의 법칙’이다. – 주식 투자 좀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행동경제학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자신이 이스라엘 공군 -카너먼은 이스라엘 사람이다.– 에서 교관 들을 대상으로 '훈련의 심리학'을 가르칠 때 경험을 들어 이 평균 회귀를 쉽게 설명한다. 그는 교관들에게 잘못을 벌하기 보다는 잘 한 일에 칭찬과 상을 주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소위,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원칙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한 노련한 교관이 반론을 제시했다. 고난도의 기동훈련에서 성과가 좋은 생도들에게 칭찬을 해주면, 다음 번 같은 훈련에서는 성과가 떨어지고, 훈련 성과가 좋지 않은 생도에게는 질책을 하면 다음 번에는 성과가 올라 간다는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면서 언제나 칭찬이 질책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아니고 질책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카너먼는 여기서 심리학자로서 ‘즐거운 통찰의 순간’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 교관의 말이 경험적으로는 옳은 것이지만 성과의 좋고 나쁨이 칭찬이나 질책과 인과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틀렸기 때문이다.
“그 교관은 당연히 평균보다 뛰어난 성과를 보인 생도만 칭찬했다. 그러나 그 생도가 그날 훈련에서만 운 좋게 잘한 거라, 칭찬의 여부와 상관없이 다음 훈련에서는 못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교관은 특별히 운이 좋지않은 생도에게만 고함을 쳤을 테고, 그 교관이 질책을 하던 말던 그 다음 훈련 때는 더 잘했을 수 있다. …. 칭찬을 받고 질책을 받고 여부와 상관없이 처음에는 결과가 좋지 못해도 다음에는 더 나은 결과가 나오고, 처음에 좋은 결과가 나오면 다음에는 더 나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이런 패턴을 ‘평균회귀라고 한다”
대니얼 카너먼의 말처럼 평균회귀는 그 원인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행운과 불운이 교차한다는 경험적 결과는 있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운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다. 다만 그것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는지 인간 능력으로는 알 수 없을 뿐이다.
불운의 시기에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성과가 좋게 나오지 않는다. 100을 투입하면 50이하의 성과가 나온다고 비유할 수 있다. 이런 시절에는 주식이던 부동산이던 투자하는 족족 손해만 볼 것이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료들 보다 더 열심히 해도 성과가 더 나오지 않는 그런 상황이다. 스스로 의기소침해지고 다른 사람들 눈치를 살피게 된다. 반면, 행운의 시기에는 투입된 노력 이상의 성과를 얻는다. 100을 투입했는데 몇 배, 심지어 몇 십 배의 성과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는 잘못된 의사결정이 의외의 대박을 가져오기도 한다. 무슨 일에 손을 대도 평균 이상의 성과가 나오는 그런 시기인 것이다.
그러나 불운과 행운은 교차하여 결국에는 평균적인 운에 이른다. 평균적인 운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을 말한다. 100을 넣으면 120-30 정도, 자신의 노력한 대가를 20-30정도 더 만들어 내는 정도의 수준이다. 큰 불만도 없고, 큰 만족도 없이 살 수 있는 수준이다. 문제는 이런 평균의 운이 일생 동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행운과 불운의 흐름이 서로 교차하면서 결과적으로 볼 때 평균에 회귀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장 내일 행운이 올 것인가 불운이 올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다만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행운과 불운에 대한 태도와 대응 뿐이다. 운을 타고난 것 같은 사람은 행운이 오던 불운이 오던 늘 행복한 사람이다. 반면, 불운이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것 같은 사람은 행운이 오던 불운이 오던 늘 불행한 사람이다. 여기서 알 수 있지만 행운과 불운은 외부에서 오는 우연적 자극이고 행복과 불행은 자극에 대한 태도와 대응이다. - 이 자극과 반응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 ‘행운이 곧 행복이고, 불운이 곧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늘 행운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늘 행복할 수는 있다. 똑같은 이치로 우리가 늘 불운하지는 않겠지만 늘 불행할 수는 있다.
늘 평균 이상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행운의 시기이건 불운의 시기이건 삶의 태도나 반응이 달라지지 않는다. 삶에는 늘 상승과 하락이 있는 것이고 자신이 상승곡선에 있건 하락곡선에 있건 결국은 운은 돌고 돌아 평균으로 회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행운의 시기에 투입한 노력 대비 몇 배 이상의 성과를 내도 그것이 다 ‘자기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불운의 시기를 위한 보험이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불운의 시기에 닥친 손실도 손실이라 보지 않는다. 불운이 닥쳐 건강도 잃고, 믿던 사람들에게 배신 당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정당하 게 치러야 할 비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평균회귀 법칙을 믿기에 오직 지금/여기라는 시간의 물마루 위에서 그저 묵묵히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지금/여기’를 그 어느 때 보다 열심히 살아 가다 보면 그 자체가 행복한 삶이 된다.
반면 늘 불행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행운이 왔을 때,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들떠서 과도하게 자랑하고 즐기며 살려고 한다. 주식 가격이 올랐다고 동네방네 자랑하면서 당장 필요도 없지만 괜히 자동차도 고급으로 바꾸고 새로운 가전제품 사는 유형의 사람들이다. 많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런 행복은 잠깐일 뿐이고, 소유한 것을 상실할까 봐 전전긍긍하게 된다. 또 계속해서 더 가지고 싶은 욕구가 자꾸 생겨나기 때문에 그런 욕구를 만족시켜 나가느라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행운의 시기는 다 가고 다시 불운의 시기가 돌아 온다. 그러면 또 이 불운이 영원할 것처럼 좌절과 원망 속에 빠진다. 그러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도 운은 평균으로 회귀하지만 행운이 오던 불운이 오던 늘 불행할 뿐이다.
불운이 그대를 은밀히 감싸기 시작하고 다가올 미래가 두려워질 때면 꼭 이 섭리를 기억하라. ‘운’은 돌고 돌아 평균으로 회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