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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적, 내면의 적

Written by 이건호 | 18년 11월 05일

지금까지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 외부에 있는 적들을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학,  입사, 승진 등의 게임에서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경쟁하거나 불확실한 환경 속에 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지의  상대와  경쟁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준비해  왔다. 학교에서는 끊임 없이 스펙을  쌓았고  직장에서는  배수의  진을  치고  불퇴전의  각오로  일했다.  그러나  삶은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프랑스 철학가 장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우리 삶을 위협하는 적은 처음에는 ‘늑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늑대는 외부의 적으로서 사람들은 이러한 적을 막기 위해 요새를 짓고 성벽을 쌓는다" 

이 경우 비록 늑대는 거칠고 무서운 존재이지만 적군과 아군의 구별이 뚜렷하여 희생이 따르더라도 전략을 세우고 적을 방비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러면 다음 단계에서 적은 ‘쥐‘의 형태를 취한다. 이 적은 늑대보다 더욱 은밀하게  다가오지만 그래도 우리는 위생학적 수단으로 적과 대응할 수 있다. 그러면 적은 더욱 진화한다. 이번에는 해충의 형태로 다가온다. 쥐보다 더욱 작아지고 민첩해진 적이지만 이번에도 각종 살충제 등을 활용하여 대응할 것이다.

그 다음은 어떨까? 해충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적은 바이러스 형태로 출현한다. 네 번째 단계는 바이러스이다.  바이러스는 사실상 4차원에서  활동한다. 바이러스는 시스템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는 까닭에, 이에 대한 방어는 훨씬 더 까다로운 과제가 된다. 전 지구에 퍼져 있는 적, 하나의  바이러스처럼 도처에  스며들고 권력의 모든 틈새로 파고드는  유령 같은 적이 출현한다’고  보드리야르는 경고했다.

그의 소위 ‘적의 계보학‘ 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늑대나 쥐나 해충, 바이러스 등은 모두 외부에서 내부로 침입하는 존재들이지만 여기서 더욱 진화한 적은 바로 내부의 정상세포가 스스로 변질하는 암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다. 2013년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있었던 끔찍한 테러가 이를 잘 증명해준다. 바로 직전까지 평범한 이웃이었던 청년들이 스스로 테러범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미  진화한  적들은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생겨나고  있는  것  은 아닐까?

지금까지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 외부에 있는 적들을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학,  입사, 승진 등의 게임에서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경쟁하거나 불확실한 환경 속에 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지의  상대와  경쟁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준비해  왔다. 학교에서는 끊임 없이 스펙을  쌓았고  직장에서는  배수의  진을  치고  불퇴전의  각오로  일했다.  그러나  삶은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왜일까?  우리의  타겟이  잘못  정해진  것은  아닐까?  정작  진짜  적은 이미 바이러스의 형태로 내부에 침투해 있거나, 암의 형태로 내부에서 자생하고 있는데, 우리는 엉뚱하게 바깥에 눈에 보이는 적들에게만 신경을 쓴 것은 아닐까?

동양  철학가  최진석  교수는  공자의  사상을  극기복례(克己復禮)로  요약할  수  있다면  노자의  사상은 ‘거피취차(去彼取此)’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자기 자신의 본성을 극복하고 세상이 만든 규범인 ‘예‘를 지키라는 것이  공자의 주장이라면,   노자는 세상이 제시한 규범을 쫓지 말고 자신이 바람직하다 여기는 것을  취하라는 의미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 하였다.

어쨌거나 거피 취차는 –비록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을지라도-  행복한 삶에 대한 답이나   지혜를 바깥(저것)에서 찾지 말고, 자기 자신(이것)에게서 찾으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보드리야르와 노자의 주장을 섞어서 보면 보다 명징한 의미가 보인다. ‘진짜 적은 내부에 있기 때문에, 외부에 있는 적만 상대한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내부에 침투한 바이러스와 암을 퇴치해야, 외부에 있는 늑대, 쥐, 해충 같은 존재와 제대로 상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한 삶‘을 위한 답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영국의 한 젊은이가 토마스 칼라일에게 고심에 찬 표정으로 어떻게 하면 썩어 빠진 세상을 개혁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라일이 대답했다.

“그대 자신을 먼저 개혁하시오. 그러면 세상에 악당이 한 명 줄어들 것이고 그만큼 세상이 더 개혁될테니까”

세상을 위해서도 그렇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 정작 우리가 싸워야 할  전장戰場은 외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외부의 적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적을 위한 전략이 진짜 전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