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섭리라는 것은 원래 인간들의 소망과는 아무 상관없이 움직인다. 이들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움직인다. 자연의 섭리는 영화에서 묘사되는 인자한 ‘인격 신’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고 항상 가혹하고 잔인한 악마도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그저 인간들의 삶에 대해, 또 관심사에 대해 무심할 뿐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가뭄으로 저수지가 마르고, 바닥을 드러내며 갈라지기까지 한다. 그러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인간은 '기아'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하늘을 탓하겠지만 하늘은 죄가 없다. 하늘은 하늘 대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 것뿐이다. 인간이 고통을 받고 안받고는 자연의 섭리가 고려하는 대상이 아니다.
개인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절벽 끝에 매달린 손을 놓으면 우리는 중력라는 자연의 섭리에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 그러면 절벽 밑으로 수직으로 내리 꽂힌다. 중력이라는 자연의 섭리는 그저 중립적일 뿐이다. 다만 우리가 고정된 형체를 가진 경직된 바위와 같은 존재라면 절벽 아래에서 산산이 부숴질 것이고, 고정된 형체가 없이 유연한 물과 같은 존재라면 부숴지지 않고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우리 자신에게서 근본적인 개혁이 있어야 자연의 섭리를 따라 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는 앞에서 알아 보았다. 그렇다면 과거를 놓아 버리고, 미래를 내맡기며, 현재를 흘러가기 위해 우리가 따라가야 할 자연의 섭리는 무엇인지 궁금할 때가 되었다. 온 우주에는 너무나 많은 자연의 섭리들이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불확실성이 높은 인생 2막을 맞이한 중년들이 반드시 실체를 알아야 하고, 그 본질적 의미를 깨달아야 하고, 그래서 자신을 내맡겨야 하는 네 가지의 자연의 섭리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자.
1. 유무상생
2. 평균회귀
3. 자극과 반응
4. 트레이드오프
내가 이 네 가지를 선택한 것은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다. 이 네 가지 외에도 세상에는 수많은 법칙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다 알 필요는 없다. 다 알 수도 없지만 안 다고 해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삶을 좀 더 진화시키기 위해 반드시 알고 익혀야 하는 것들도 있다.
자연의 섭리 중 어떤 것들은 이미 우리의 몸과 마음에 프로그램되어 있을 것이고 또 어떤 것들은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네 가지는 내가 경험과 공부라는 시행착오를 통해 배운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배우고 나니 ‘미리 알고 깨달았더라면 사는 데 참 도움이 되었 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과거를 놓아 버리거나 미래를 내맡길 때, 또 현재에 존재할 때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네 가지 법칙은 서로 관련이 있다.
1. 유무상생: 세상은 독립적 실체들의 집합소가 아니다. 행운과 불운 같이 대립되는 것들이 서로 관계하면서 변화해 간다. 행운만 따로 있을 수는 없다. 불운이 있어야 행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불운도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이다.
2. 평균회귀: 그런데 이 행운과 불운은 돌고 돌아서 크게 보면 평균으로 회귀한다. 그러니까 자신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운 뿐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며 영원히 불운이 지속되면 어 쩌나 하는 두려움도 어리석은 것이다.
3. 자극과 반응: 행운과 불운은 그저 외부의 자극일 뿐이다. 반면 인간이 느끼는 행복과 불 행은 반응이다. 인간의 삶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내부의 반응에 영향을 받는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야 삶이 보다 자유로워진다.
4. 트레이드오프: 올바른 반응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서로 트레이트 오프관계에 있는 것들은 다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자기다운 행복을 누리려면 자기가 아닌 것은 포기해야 한다. 그래야 행복이 오래 간다.
‘유무상생’이 가장 포괄적인 섭리고 그 다음 ‘평균회귀‘, ‘자극과 반응‘, ‘트레이드오프’ 순이다. 우리 가 살면서 어떤 문제나 갈림길에 섰을 때, 이 섭리들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지난 10년의 내 삶을 돌아 보면, 이 네 가지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섭리에 나를 온전히 내맡기고 복종했을 때와 그 섭리에 저항했을 때의 차이 또한 분명함을 느낀다. 물론 40대 초/중반에는 항상 그 섭리들에 저항하는 편이었다. 사실 그 때는 그런 섭리들이 있는지도 또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을 때였다.
나는 마흔이 되던 해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었다. 늘 대규모 조직의 메커니즘에 적응이 잘 안 된다고 느꼈는데 마침 혼자서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와서 과감하게 절벽에 매달린 손을 놓았다. 그래서 그로부터 10여 년을 절반은 중국에 있는 마케팅 회사에서 컨설팅 자문을 하고 나머지 절반은 한국에서는 강의와 코칭 등을 하면서 기업 조직에 묶인 사람들보다는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조직을 떨어져 나와 혼자서 살아가는 삶이 단순히 '비교적 자유로웠다'라고만 표현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늘 마주해야 하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또 조직인이 아니라서 가질 수 없는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망 등이 겨울철 유리창에 낀 서리처럼 항상 내 마음에 서려있었다.
누구나 그 맘때는 그랬겠지만 나도 내 인생에서 항상 좋은 것만 있기를 원했다. 유무상생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나쁜 일도 그 나름대로 내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치러야 할 필수비용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작은 손해도 참지 못했다. 그래서 나쁜 일이 생길 경우에는 그 사실로 인해 분노가 생기고 이 분노를 다른 상대에게 투사했다. 그로 인해 주위의 사람들이 마음 에서부터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일년을 마감할 때는 올해의 수확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항상 전전긍긍하고 노심초사하면서 매사에 고군분투는 태도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걱정하고 불안해 하면서 혼자서 세상과 치열하게 싸우지 않으면 영원히 나락에라도 떨어질 것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평균회귀의 섭리를 몰랐기 때문에 한번 불운의 시기로 빠지면 다시 회복될 수 없을 것이므로 어떻게든 나의 의지가 개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3자의 관점에서 보는 나의 삶은 평균 이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웠지만, 내 마음은 항상 분노와 자부심, 그리고 두려움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지옥과 천국을 왔다 갔다 했다. 그렇게 민감해진 마음은 모든 외부 자극에는 가장 본능적인 방식으로만 대응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조그마한 틈도 없었다. 분노, 자부심, 두려움 욕망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늘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화를 부추기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분노나 냉소로 되갚음을 했다. 겉으로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예절이나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적은 없지만 마음은 언제나 투사나 전사가 되어 늘 '과도한 상상' 속에 살았다.
작고 사소해서 그냥 넘길 수 있는 일들도 마음은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언제가 보복을 위한 재료로 삼았다. 그래서 모든 동료들은 부하 아니면 경쟁자였고, 고객들마저 내가 논리로 제압해야 하는 나의 '적'이었다. 그 때 내 마음 속의 나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전쟁터를 누비는 전사였다. 그런 자화상이 주는 저급한 매력에 흠뻑 빠져서 인생의 보다 큰 그림을 보지 못했다. 인생에는 ‘내용contents’말고도 ‘맥락context’이라는 것이 있는데 내용에 푹 빠져서 맥락은 다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저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이것과 저것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무리를 했다. 기업혁신에서는 품질과 비용 간의 트레이드오프 관계를 받아 들여야 할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극복해야할 경영 상의 장애로 간주하기 때문에 거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삶에서도 트레이트오프 관계에 있는 것들을 모두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삶에서는 확실히 달랐다. 자유를 위해 조직을 떠났으면 권력은 포기해야 한다. 부 와 명예는 조직을 떠나와도 어느 정도 챙길 수 있지만 권력은 조직 안에 있지 않는 한 어느 수준 이상 가지기가 어렵다. 조직에서 말하는 과장, 부장, 상무 등의 포지션은 바로 권력의 수준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했다. 책임을 지지 않는 권력이란 존중 받을 수도 없음에도 책임보다 훨씬 큰 권력을 욕망했던 것이다. 포기할 것을 포기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면 결국은 탈이 나는데도 말이다.
2006년에 시작한 나의 새로운 라이프모델은 그럭저럭 잘 나가다가 2009년쯤 불어 닥친 세계적 경기침체와 함께 후퇴하기 시작했다. 수년간 관계를 가졌던 고객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갈 즈음, 나는 또 다시 라이프모델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했다. 스승을 한 분 만나고 인문학과 관련된 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동안 직업을 통해 배웠던 전략이라는 주제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공부하면서, 정치, 전쟁, 비즈니스에 활용되던 전략을 개인의 삶이라는 영역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 이후 나의 첫 책도 그런 주제로 쓰기 시작했다.
지금 돌아 보면, 확실히 삶이 내게 말을 걸어 온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스스로 나의 의지에 의해서 이 길을 찾아 보고 논리적인 비용편익분석을 거쳐서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면 나는 그저 펼쳐지는 세계 안에 있었을 뿐이고 삶이 나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엉겁결에 그 손을 잡은 것이다. 나는 그때 우연히 읽던 '주역' 관련 책에서 '섭대천涉大川'이라는 단어와 만난다. 그리고 그 이후 섭대천은 나의 가슴에 선명하게 각인된다. 그와 관련된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치 나에게 누군가가 ‘섭대천‘이 라는 화두를 던진 것처럼 그 세 글자가 하루 종일 머리 속에서 아른아른거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아마 그 또한 삶이 내게 던진 화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