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 회피는 모험 회피와 다르다. 불확실성 대 모험의 관계는 불안 대 공포의 관계와 같다. 공포는 뚜렷한 대상이 있어서 그 대상을 극복하면 해결이 되는 반면, 불안은 막연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것이므로 그 자체가 삶의 방식 혹은 존재 방식처럼 되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같이 불확실성 회피 성향이 강한 문화에서는 사회 전반에 삶에 대한 불안이 퍼져 있고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늘 불안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등 개인의 삶을 둘러싼 환경들이 더욱 불확실해지고 있다. 이것은 여전히 불확실성 회피 경향이 강한 문화 속에 사는 우리들의 삶이 더욱 불안해진다는 의미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거기에 대해 대비하고자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미래에 최악의 경우가 발생할 확률이 딱히 높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 상황인 최상의 경우도 있고, 또 다른 경우의 수도 많다. 미래는 무수한 경우의 수로 발생한다. 최악의 경우도 그런 여러 ‘경우의 수’중에 하나일 뿐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해고를 당하고 사회적으로 고립 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이것도 미래의 무수한 경우들 중 하나일 뿐인데, 그것이 최악의 경우이 다 보니 다른 경우들보다 두드러지게 보인다. 두드러지게 보인다 해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것 은 아닌데도 우리는 그것이 당장 닥쳐올 재앙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최악의 경우에 대한 대비책을 단기간에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악의 경우란 그야말로 최악이라서 당장 대비책이 마련되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시간과 정신적/물질적 에너지를 투자해야 마련되는 것이다. 요즘은 40대 후반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직장에서 퇴직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만, 막상 퇴직 후 대비책을 마련하려고 하면 당장 무슨 준비를 해야 할지 누구나 막막하기 마련이다. 퇴직이라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연구와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직장을 다니는 40, 50대들은 대부분 실직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원치 않는 실직’에 대한 두려움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나타난다. 우선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당장 그 다음 날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상상을 하게 된다. 아침에 출근 하지 않아도 되니 늦잠을 푹 잘 수 있겠거니 하겠지만 그것도 며칠뿐이다. 관성에 의해 늘 새벽 5-6시면 눈이 저절로 떠지게 된다. 그리고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이 휴가라면 축복이지만 실직에 의한 것이라면 감옥이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직장에서는 매일 같이 종일 불이 나던 스마트 폰에 단 한 통의 통화도 문자도 없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잊혀져 버린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모두들 무인도 홀로 남겨진 ‘로빈슨 크루소’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그나마 심리적인 것이지만 물질적으로도 당장 매달 들어가야 할 생활비며 세금이며 보험료는 어떻게 조달 할 것인가 등등 실직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최악의 상황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르고, 그런 최악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비할까를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다. 모아 둔 돈으로 해볼만한 것이라고는 빵집이나 치킨 집 정도인데 이미 살고 있는 동네에 그런 류의 상점들은 너무나 많아 보이고 또 장사도 그렇게 신통치 않아 보인다. 신문에서는 퇴직하고 창업한 사람들의 몇 퍼센트가 1년 안에 폐업을 한다는 둥, 도대체 안 좋은 뉴스들만 들린다. 그러다 보니 실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되고, 그러면 실직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지기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직장에 다니면서 이렇게 실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면 마치 ‘나를 해고 시켜줘‘라는 말을 이마에 써 붙이는 격이 된다. 이미 실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감이 사라지고 상사나 동료들의 눈치만 보게 되는 등 매사 소극적이고 방어적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은 실직에 대한 두려움이 실직을 불러오는 꼴이 되고 만다. 그래서 ‘두려움은 항상 두려워하는 대상을 불러 들인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심해지면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게 확률상 잘 일어나지 않을 최악의 경우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자신의 두려움을 더욱 강화시키게 된다. 이것도 바로 ‘과도한 생각‘의 폐해다. 그런데 여기다 한술 더 떠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최악의 경우에 대한 – 단기간에 준비하기 힘든-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작 지금/여기에서의 하루하루 삶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진다. 두려움이 인간생존을 위해 순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역기능을 하는 꼴이다. 미래를 잘 대비하려는 이런 두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미래가 오기도 전에 지쳐버리게 만든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다가올 미래에 대해 하룻밤 사이에 머릿속에서 끊임 없이 수많은 시나리오 썼다가 지우고, 대비책을 고민하느라 온갖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 붓지만 아침이면 모든 것이 제자리인, 그런 경험들을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다 해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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