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빵집이나 치킨, 카페와 같은 창업을 많이 한다. 그러나 이것이 단 순한 생계형 창업일 경우 대부분 오래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빵집이나 치킨집, 카페와 같은 사 업의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쉽게 실패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앞서 얘기 했듯이 남들이 다 가는 손쉬운 길에 들어섰으니 치열한 경쟁은 당연한 리스크이다.
치열한 경쟁은 실패의 원인이 아니라 스스로가 한 선택의 결과이자 그 사업의 구조적 특징이다. 그런 구조 속에서 잘 견디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야말로 '전전긍긍, 노심초사, 고군분투'하게 된다. 그러다가 일부는 폐업을 하고 다른 사업, 보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아이템이 없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것이 빵집이던, 치킨 집이던 오래 견디지 못하는 이유가 오로지 치열한 경쟁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생계만을 위한 창업이기 때문이다. 즉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말고 업을 통해 추구 하고자 하는 가치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業 은 그 역할, 즉 먹고 살만 한 돈을 벌어들이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퇴직 후 조그마한 프랜차이즈 식당을 연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음식에 대한 특별한 철학이 있 는 것도 아니라서 본사에서 시키는 대로 음식을 제공한다. 고객들에 대한 서비스도 그저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긴다. 해 본적도 없지만, 특별히 고객에게 굽실거리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업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하지 않는다.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주인들은 대부분 카운터에 앉아서 매상만 챙기려고 한다.
음식에 대한 장인정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객을 끌어들이고 만족시키려고 하는 서비스 정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창업은 했지만 사업체를 어떻게 키워갈 것인가 하는 기업가 정신이라고는 전혀 없이 그저 하루하루 벌어들이는 돈에만 신경을 쓰는 꼴이다. 그렇기 때문에 손님들이 몰려와 돈 을 벌면 업을 유지하지만 손님들이 오지 않으면 그 업을 유지할 아무런 동기가 없다.
하지만 업을 통해 추구하는 보다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면 당장은 돈을 벌지 못해도 견딜 수 있는 동기가 생긴다. 이런 사람들은 단순한 호떡을 팔아도 자신이 만들어 파는 호떡에 대한 장인 정신이 있다. 그리고 ‘호떡 사업’ 자체에 대한 기업가 정신도 있다. 얼마 전 TV 시사 프로그램에서 그런 사례가 방송되었다.
우리나라도 아닌 덴마크라는 멀고 먼 낯선 땅에서 대단한 음식도 아닌 ‘호떡' 하나로 시작해서 한국식당으로까지 사업을 성장시킨 30대 초반의 젊은이 이야기다. 덴마크로 유학을 가서 어려운 공학석사까지 땄음에도 왜 호떡 사업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간의 사정보다는 30대 초반의 젊은 주인공이 남들이 들으면 놀릴 수도 있는 소위 '호떡 장사'를 하는 데 있어 보여준 태도가 눈길을 끌었다. ‘호떡’이라는 상품 자체도 기름에 튀기고 설탕을 넣은, 흔히 보는 호떡과는 다르다. 이스트로 발효시켜 기름에 구운 호떡 안에 불고기나 김치, 견과류가 들어있다. 건강에 민감한 덴마크 사람들의 취향에 맞춰 오랜 연구 끝에 현지화한 호떡인 것이다.
이 주인공이 언제부터 호떡 전문가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호떡 사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그는 호떡에 대한 ‘장인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자전거를 개조한 이동식 좌판에서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4년 만에 한국음식 전문 식당을 파트너들과 힘을 합쳐 개업하기에 이른다. 이런 결과를 보면 그에겐 비록 호떡으로 시작하였지만 한국음식 사업에 대한 '기업가 정신'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장인정신과 기업가 정신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그가 사업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에서 나온다. 그러면 이 젊은이는 호떡, 더 나아가 한국음식 사업을 통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었을까? 그가 호떡 사업을 통해 추구하는 가치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호떡을 통해서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고, 문화를 교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덴마크 사람들은 여기서 한국의 간식거리를 먹으면서 한국말도 배우고, 한국 문화도 즐긴다. 그리고 덴마크에 살거나 방문 중인 한국인들은 이곳을 찾아 향수를 느끼고 최신의 정보를 주고 받으며 서로 정을 나눈다. 이 젊은이 는 그런 소박한 가치를 위해 호떡 사업을 벌였고, 더 나아가 한국식당을 열었다. 그가 이 사업을 통해 떼 돈을 벌지, 아니면 그야 말로 폭삭 망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단지 생계만을 위해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박하지만 뚜렷한 가치가 있고 이를 추구하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장인정신과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동네 호떡장사라도 이렇게 하면 '사업' 다워 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말을 하면 현장에서 하루하루 빠듯하게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개뿔, ‘가치’는 무슨, 그 호떡 장사는 부모가 부자라 먹고 사는 문제는 없었겠지…… '
누군가 그렇게 얘기 한다면 그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테니 고개를 끄덕여 줄 수 밖 에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꼭 해 주고 싶다. ‘정말 먹고 살기 바빠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추구하는 가치’가 있다는 것이야 말로 물질보다 인간의 생존력을 더욱 높여주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가치가 돈보다 더 강한 힘이 됨에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면 애써 외면 하던지. 업을 통해 추구하 는 가치가 있다면 현재 하는 일이 어려워져 생계가 궁핍해져도 더욱 끈기 있게 밀어 붙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일 자체가 그저 생계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면, 장사가 잘 안돼서 생계가 어려워질 때는 다른 일을 모색해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이렇게 항변한다.
'돈이 안될 때 바로 포기하는 것이 낫지 가치니 뭐니 하는 것을 추구하느라 시간 끌다 보면 손해만 더 커진다' 고 말이다. 그 말이 단기적으로는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추구하는 가치가 없다면 사업은 경쟁자들과 차별화하기도 힘들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도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자발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이 되기도 힘들다. 그것은 삶 자체도 마찬가지다.
북경의 호텔매니저인 B양이나 덴마크 호떡장수의 경우에는 젊은 나이에도 추구하는 가치가 비교적 분명했다. B양은 ‘내 앞에 펼쳐진 틀에 박힌 삶의 패턴을 쫓지 않겠다. 그것이 무엇이든 뻔한 것만 아니면 도전하고 본다’는 젊은이다운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호떡장수 역시 '사람이 음식을 매개로 모이는 소박한 플랫폼을 만들어 사람과 사람의 교류를 도모하겠다'는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장애와 애로 속에서도 일상을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들은 비록 2-30대의 젊은이들이지만 남들이 가는 넓고 안정적인 길을 마다하 고 거친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분명한 가치를 가지고 ‘창발적 기회’를 포착한 점 등에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가느냐, 아니면 자신에게 찾아온 창발적 기회를 징검다리 삼아 한발씩 나가느냐 하는 전략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전에 그대가 추구하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런 가치가 없다면 창발적 기회에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남들이 다 가는 길을 선택하곤 한다. 그 길이 특별히 자신에게 맞아서라기 보다는 그저 ‘남들 이 많이 하니까 아무래도 남들이 하지 않는 것보다는 좋지 않겠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말이다.
그러나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있는 사람은 창발적 기회가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비록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라도, 그래서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불확실한 길이라도 자신에게 다가온 창발적 기회라는 것을 ‘알아 본’ 사람들은 그 호젓한 길로 접어 들어서 은밀한 모험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칙센트미하이는 이러한 삶에 대한 두 가지 선택을 '발견한 인생주제'와 '받아들인 인생주제'라는 개념으로 구별하여 설명하였다.
“자신이 발견한 인생의 주제가 있는 사람은 개인적 경험과 선택에 대한 인식에 입각해 자신의 행동을 위한 대본을 직접 쓰는 사람이며, 받아들인 인생의 주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오래 전에 이미 작성해 놓았던 대본에 미리 규정되어 있는 역할을 그저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사회가 안정되고 불확실성이 높지 않다면 ‘받아들인 인생주제’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가 급속하게 변화하고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는 이렇게 '받아들인 인생주제'들이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유도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는 그러한 극단적 사례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냉혹하게 수만 명의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냈던 나치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을 제시하였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구심을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듯하다. 명령을 따르는 동안 -최소한의 비용으로 많은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그의 의식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에게 인생의 의미란, 강력하고 조직화된 기관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그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관료주의적 규칙을 추종하다 못해 신성시 했던 사람이었다. 만약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대였다면 희대의 살육자인 아이히만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일에 충실한 관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히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요즘처럼 변화가 무쌍한 세계에서는 -개인적으로는 큰 변혁을 겪게 되는 인생의 2막에서는 더더욱- 자신이 추구하는 올바른 가치를 가지지 못한 채, 남들을 쫓아 세상이 제시하는 인생의 주제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리스크일 수도 있다. 물론, 자신이 스스로 '발견한 인생주제'를 쫓아 가는 것도 나름대로의 리스크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감수할 가치가 있는 리스크이다. 칙센트미하이는 그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발견한 인생의 주제는 인생의 목적을 찾고자 하는 개인적 투쟁의 산물이므로 사회적 정통성이 결여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새롭고 특이한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무모하다거나 파괴적인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
덴마크 호떡 장수의 경우 우리 사회의 통념상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에서 열심히 자식을 키우는 평범한 부모들이라면 ‘어렵사리 유학 가서 공부도 곧잘 했는데 허구만은 직업 중에 호떡장수라니 부모님이 얼마나 어이 없어 하겠는가’ 하고 생각 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생 주제들 중에는 개인별로 새롭게 발견하고 자유롭게 선택한 것들, 즉 '발견한 인생주제'가 대부 분이다. 급진적인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말콤 엑스가 딱 그런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어렸을 때 는 1950년대 미국의 흑인 슬럼가에서 자라난 청소년이 대게 그렇듯 마약을 비롯해 각종 범죄에 손을 댔고, 그렇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말콤 엑스 주변에 선배나 동료 등의 사는 모습은 다 똑같았고 말콤도 그런 길을 아무런 의심 없이 그저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독서와 명상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자긍심을 깨닫게 된다. 그 이후 자신은 물론이고 흑인과 백인을 가리지 않고 많은 주변인들의 삶에 질서를 찾아주 는 것을 자신이 좇아야 할 가치로 삼게 된다. 그런 가치를 가지게 되자, 남들이 가는 길이 아닌 자신이 발견한 길을 갈 수 있었다. 비록 1960년대는 미국에서조차 인권이 핍박 받던 시절이라, 개인적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고 결국은 암살로 삶을 마쳐야 했지만,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그가 던진 메시지는 세상을 바꿀 만한 영향력이 있었다. 어려서 우등생소리를 듣던 말콤이라 '받아들인 인생주제'를 쫓아갔다면 무시무시한 흑인 갱단 두목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말콤 엑스는 자신이 스스로 ‘발견한 인생주제’를 좇음으로써 위대한 흑인 인권 운동가가 되었던 것이다.
여름 날 밤새도록 내린 큰 비에 동네 개천이 불어서 맨몸으로는 건널 수 없을 경우를 상상해보자. 평소에는 아이들이 뛰어 놀 정도의 작은 개천이었지만 이미 비로 인해 불어난 개천은 물살도 세서 어른들도 자칫하다가는 떠내려갈 정도이다. 그대라면 이 불어난 개천을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조미니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개천너머 목표지점까지 큰 다리를 놓으려고 할 것이다. 목표지점을 정해 놓고 현재지점에서 목표지점까지 측량을 한 후, 튼튼하고 넓은 콘크리트 다리 하나 놓으면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시간과 비용, 다리를 건설하는 동안 만나게 될 각종 불확 실한 돌발상황들 그리고 불어난 물이 빠진 후에도 큰 다리가 필요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만 없다 면 이 또한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 유형의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우선 가장 적절한 장소에 한 사람 이 디딜 수 있을 정도의 돌 하나를 던져서 첫 징검다리를 놓는다. 그리고 두 번째 돌을 들고 첫 징검다리 돌 위에 서서 두 번째 돌을 놓을 가장 적절한 장소를 찾아내야 한다. 첫 징검다리 돌을 놓는 순간 물살의 방향은 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첫 돌을 놓기 전에는 두 번째 돌을 놓을 최적 자리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 돌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돌 위에 올라서야 세 번째 돌을 놓기에 적당한 장소가 보일 것이다. 거기가 세 번째 징검다리 돌을 놓은 가장 최적의 장소인지 아닌지는 첫 번째 징검다리 돌 위에서는 알 수가 없다.
‘욕심 내지 않고, 차근차근, 그러나 끊임 없이‘ 자신이 정한 방향(가치)을 추구하면서 현재라는 시간의 물마루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 을 묵묵히 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다음 순간의 기회를 알아 차릴 수 있는 혜안을 가질 수 있다.
미래를 내맡긴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징검다리'를 놓는 것과 흡사하다.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 고 욕심내지 않고 차근차근 그러나 끊임 없이 '지금/여기'에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창발적으로 나타나는 기회를 알아보고 포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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