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현재에 존재해야 하는가? - 카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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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5월 08일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과거를 놓아버리고, 미래를 내맡기고 나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현재, 즉 '지금/여기'에 존재하게 된다. 사실 인간은 그 물리적/정신적 인식능력의 한계로 인해 '지금/여기'외에는 인식할 수 없다. 지금/여기에서 기억하는 과거나 예측하는 미래는 다 실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금/여기 보다는 과거나 미래에 더 신경을 쓴다. 과거에 대한 회한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습성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자극을 통제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는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 문에 많은 정신적 에너지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금/여기'에 집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인간이 그나마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는 오직 ‘지금/여기’뿐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자원이라고 보는한 인간은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며 현재를 소홀히 여기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영원한 현재라고 보게 되면 과거나 미래에 구애 받지 않고 현재에 충실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을 과거에서 시작해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흘러가는 어떤 것으로 각자에게는 주어지는 유한한 자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간의 힘은 엄청 강해서 시간이 지나가면 우주에는 언제나 '엔트로피'라고 하는 무질서가 생기게 된다. 이것이 물리학에서 얘기하 는 '열역학 제 2법칙'이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다른 개념도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을 두 가지 유형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시간을 다루는 두 명의 인격화된 神을 제시하고 있는데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그들이다.

Businessman standing and making his choice between times


신화 속에서 크로노스는 ‘자식을 잡아 먹는 아버지‘라는 끔찍한 상징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아버지는 과거를, 아들은 현재를 상징한다. 크로노스적 시간의 개념은 과거가 현재를 잡아 먹는다고 보는 것이다. 무자비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과거에서 흘러와서 현재를 삼키고, 또 미래도 삼켜 모든 것을 과거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크로노스적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시간 개념하에서 사람들은 빠른 것을 항상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빠르게 뭔가를 해내면 좋은 것이다. 상대적으로 느리면 그것은 시간이라는 유한한 자원의 낭비이고 죄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대화된 효율성을 가장 좋은 가치로 친다. 또 이렇게 흘러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비가역적 특성을 생각할 때, 지구 상의 모든 생명은 탄생, 성장, 성숙, 쇠퇴의 지난한 언덕길을 넘어가야 하는 운명에 속박되어 있다.

그래서 쇠퇴의 내리막을 걷고 있는 노인과 같은 존재들은 곧 사라질 '엔트로피'로 취급 받는다. 이런 크로노스적 시간의 개념 속에 갇히게 되면 인간은 크로노스의 노예가 된다. 후회로 인해 과 거에 얽매이고, 두려움으로 미래에 사로잡혀 살다가 언젠가는 자신도 아들을 잡아 먹는 무자비한 크로노스의 희생물이 될 뿐이다. 신화에 따르면 크로노스는 저 유명한 판도라 상자에 들어 있었 다. 상자를 여는 순간 세상에 나와서 인간의 삶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은 크로노스뿐 아니라 카이로스라고 하는 시간의 神 도 만들었다. 카이로스는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객관적이고 양적인 시간이 아니라 주관적이며 질적인 시간, 즉 기회chance를 의미한다. 이 카이로스적 시간의 핵심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지금이란, 시간의 최첨단을 의미한다. 바로 내가 존재하는 찰나의 물마루인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이란, 항상 그 시간의 최첨단, 찰나의 물마루에만 존재할 수 있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금’에 머물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삶에 주어진 시간이라는 것은 예외없이 ‘영원한 현재’뿐이다. 과거도 미래도 다 관념적인 것이다. 실재적인 시간은 오직 현재뿐이다.

인간이 존재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지금'뿐인데 그 지금을 소홀히 산다는 것은 삶을 소홀히 산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고 분노하느라, 또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고 욕망 하느라 지금 여기서 전전긍긍하고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한 삶,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그것도 바로 '지금/여기'라는 시간의 최첨단에 몰입해야 한다.

‘지금/여기’에 몰입하는 것은 칙센트미하이의 말처럼 ‘지금/여기를 통제 하지 않고 흘러 가는대로 몸을 맡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조셉 자보르스키의 '펼쳐지는 세계가 나를 관통하도록 내 버려두라'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펼쳐지는 세상이란 마치 뜨거운 후라이팬에서 옥수수 알갱이가 팡팡 터지면서 팝콘으로 재탄생 하듯 우주 어딘가 감춰져 있던 시간들이 팡팡 터져나오면서 '지금'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매 순간마다 새로운 지금이 펼쳐지는 경이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 경이로운 지금은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과거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또 그만큼의 지금이 어느 순간에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늘 지금이라는 시간의 물마루 위에서 서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clock hands being pushed back by a business man


서핑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모든 익스트림 스포츠 extreme sport 가 그렇지만 파도를 타는 서핑도 그 순간에 몰입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스포츠이다. 집채만한 파도 속에서 균형을 잡고 스릴과 스피드를 즐기는 서핑, 깎아 지른 듯한 까마득한 절벽을 맨손으로 올라가는 암벽 등반이나 급경 사의 눈 덮인 산을 스키로 활강하는 산악 스키 등도 마찬가지다. 보통사람들이 볼 때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소위 목숨 걸고 하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의 한결 같은 애기는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듯 하고, 의식적인 행동보다는 거대한 무언가를 따라 그저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하긴 어찌 보면 절체절명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서핑, 암벽등반, 스키활강의 매순간 마다 정신을 차리고 눈 앞의 장애물은 물론, 가까운 미래에 닥칠 불확실한 위험들을 이성적으로 계산해서 최적의 행동을 하려고 하면, 오히려 목숨을 온전히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이성적으로 행동하자면 인간은 두려움이라는 커다란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에고가 던지는 질문에 답도 해야 한다. 그 질문에 답하기 시작하면 말려 들어가는 것이다. 절대 에고의 질문에 답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내맡기겠다고 맹세할 뿐.

그렇게 거대한 자연의 섭리에 자신을 내맡길 때 그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flow’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익스트림 스포츠는 그렇다 치고 평범한 오늘과 지루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우리는 어떨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지금/여기‘에 몰입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지금/여기가 불행하다면, 그 래도 지금/여기에 집중해야 하는가?

두 질문에 대한 답은 Yes나 No가 아니라, ‘그래야한다’가 더 적당할 것 같다.인간이 가진 한계로 인해 우리는 지금/여기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여기’가 좋은 조건이던 나쁜 조건이던 상관없이 ‘지금/여기’에서 답을 찾으려 노력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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