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자연의 섭리 - 첫 번째, 유무상생

8 min read
19년 7월 30일

섭대천, ‘큰 물을 건넌다’는 의미로 인생을 살다가 누구나 만나게 되는 실천적 모험을 의미한다. 아마도 조직을 떠나와 새로운 라이프모델을 추구하는 상황이 바로 ‘섭대천’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런데 출렁이는 바다를 건너가면서도 나는 항해를 하기보다 여전히 등반을 하고 있었다. 매년, 매 분기, 소유지향적 목표를 세워 놓고 그것의 달성 여부로 스스로 평가하면서 사냥감을 쫓는 사냥개처럼 자신을 훈련시켰다.

그러나 지금 내가 바다를 건너고 있다는 것, 즉 ‘섭대천’ 중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부터는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은 정복해야 할 목표보다, 추구해야 할 방향의 필요성과 소중함을 깨달았다. 바다에서는 아무리 최첨단의 장비가 있다 한들 자신의 의지대로만 하려 해서는 안 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다 위에서 ‘추구해야 할 방향’ 이라는 것도 사랑이나 이타적 연민 등과 같은 ‘도덕적 가치’라 생각했는데 시행착오를 겪어 보니 방향은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바로 자연의 섭리 그 자체였다. 유무상생과 평균회귀, 자극과 반응, 트레이드오프와 같은 자연의 섭리가 바로 내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었던 것이다. 그 자연의 섭리들 역시 달성하거나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추구할 뿐이다. 북극성의 밝은 빛을 따라 간다 해서 북극성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이 자연의 섭리들을 북극성 삼아 따라 가면 나는 분명 어딘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내가 도착할 수 있는 최선의 장소가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게 되었다.

Boat drifting away in middle ocean after storm without course moonlight sky night skyline clouds background. Nature landscape screen saver. Life hope concept. Elements of this image furnished by NASA


사실, 홀로서기를 시작한지 10년의 마지막 2년은 다시금 조직으로 돌아갔다. 북경이라는 낯선 땅 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2년 간 대규모 조직의 일원으로, 직장인의 삶을 살았다. 참 아이러니 하지 만 그 2년 동안 나의 의식은 밑바닥을 경험하면서 많은 것들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시간이 그렇게 여유로웠던 시절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진리들이 오히려 눈코 뜰새 없이 바빴던 그 시절에 내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상황이 나에게 에고를 포기하고 자연의 섭리에 너를 내맡기라고 애기하는 것 같았다.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보니 북경의 2년이 나에게는 창발적 기회였고, ‘섭대천‘을 위한 또 하나의 징검다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8년간의 1인 기업을 하면서 겪었던 경험과 각종 시행착오들이 북경에서 2년간 직장인의 삶을 사는 동안의 경험과 어우러져 네 개의 자연의 섭리를 나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 법칙을 따라 가면 지금은 어딘지 몰라도 결국은 어딘가에 도착할 것이고 거기가 최선의 목적지임을 믿게 된 것이다. 한때는 전략을 이용해서 적어도 세상에 지배 당하지 않는 당당한 개인으로서 사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나의 첫 책도 바로 그런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놓아 버리고, 내맡기며, 현존하여’ 물처럼 자연의 섭리를 따라 세상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 전략적인 관점에서도 더 고수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길잡이 별인 네 가지 자연의 섭리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도록 하겠다.


유무상생(有無相生)-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늘 함께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세상의 이치를 ‘유무상생(有無相生)’으로 역설했다. 그 말은 이 세상에는 ‘있는 것과 없는 것처럼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함께 살아간다’ 는 것이다. 그래야 삶이라는 것이 이루어 진다. 최진석 교수는 컵을 예로 들어 유무상생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컵은 그 안에 텅 빈 공간이 있어야 비로소 컵으로 작용할 수 있게됩니다”

 

close up of  a white cup on white background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종이컵은 무엇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은 컵의 재질인 종이를 얘기 할 것이다. 그러나 종이컵 자체는 종이라는 물질로 만들어졌지만 컵이라는 기능을 다하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바로 비물질인 공간이 있어야 한다. 종이로 만들어진 중앙에 비어 있는 공간이 있기에 우리는 거기에 물을 담아서 마실 수 있다. 물질인 종이(有)와 비물질인 공간(無)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존재할 때(相生), 종이컵이라는 기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노자는 세계를 ‘독립적인 실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립하는 것들의 관계’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새벽 별이 그토록 반짝일 수 있는 것은 새벽 하늘이 그토록 어둡기 때문이다. ‘빛’은 그 대립 면에 있는 ‘어둠’과의 관계 속에서 밝음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일 뿐, 어둠이 없다면 빛도 그 특성을 세상에 드러낼 수 없다. 이렇게 물질과 비물질, 빛과 어둠, 행운과 불운 등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조화롭게 짝을 이루어야 제 기능을 한다는 것이 노자가 유무상생을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세상사의 원칙이다.

흑사병이 유럽 인구에 1/3을 휩쓸고 지나가던 14세기 후반, 그 지옥 같던 영국 항구도시 노리치에 줄리언이라는 신앙심이 깊은 여자가 살았다. 우리는 그녀를 통해서는 유무상생이라는 섭리가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배울 수 있다.

“우리의 인생에는 행운과 불운이 멋지게 어우러져 있다…… 어떤 때는 행운으로 치달아 오르다가 어떤 때는 불운으로 떨어지고 만다"

여기서 노리치의 줄리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삶은 행운과 불운이 두 가지를 모두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이 행운으로만 가득 찬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상, 행운으로만 가득 찬 인생은 멋진 것이 아니다. 행운만 있다면, 그것이 행운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불운이야말로 행운을 좋은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줄리언은 바로 그 점을 강조 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긴, 세상에 굴러다니는 차가 다 벤츠라면, 그대의 차가 벤츠인들 그것을 좋은 차라고 느낄 수 없지 않겠는가.

이를 보면 줄리언도 노자와 같이 세상은-특히 인생은- 서로를 규정짓는 대립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다만, 노자보다 조금 더 센스있는 표현을 썼다면 ‘멋진 어우러짐 ‘ 정도다. 이 ‘멋진 어우러짐‘ 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는 유무상생이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정신과 의사 숀 크리스토퍼 셰어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애기했다.

“인생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멋지게, 필수적으로 어우러져야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지혜를 마음으로 터득한 사람은 인생을 좌지우지하려고 하는 분노, 전혀 쓸모 없고 불필요한 분노를 털어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나쁜 일이 고통을 주기는 하지만 쓸모 있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훨씬 의연하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을 훨씬 훌륭하게 견디어내고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고통과 불운을 겪을 수 없다면, 행운도 좋은 것으로 느낄 수 없다‘ 이것이 삶과 관련하여 가장 근본적인 자연의 섭리인 것 같다. 특히, 인생 2막의 무대에 서 있는 중년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섭리인 듯 하다. 그러므로 고통과 불운을 막연히 두려워하고 무조건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다고 행복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세상을 사람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고통 또한 겪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통을 겪을 가능성이 크면 클수록, 행복을 느낄 가능성도 비례해서 커지기 때문 이다. 이런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에 대한 후회에 매달리지 않게 만든다. 또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현재를 왜곡하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노리치의 줄리언은 “만사가 좋고, 만사가 좋을 것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그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좋은 일은 좋은 일이기 때문에 좋고, 나쁜 일은 좋은 일의 가치를 극대화시키니 또한 좋다. 그러므로 세상사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유무상생의 법칙이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립되는 것들은 서로 함께 존재한다’ 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독자적인 성질이나 본질에 의해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립되는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자는 내가 ‘나’이기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근거인 나만의 본질' 따위는 없다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 내 안에 있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본질적 실체로 인해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상대하고 있는 대상들과의 ‘관계‘로 인해 내가 그때 그때 규정된다. 실제로 나는 아들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요, 남편이자 형제이며 친구이다. 또 작가이자 독자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최진석 교수의 절묘한 표현처럼 ‘타인의 타인’일 뿐이다.

Cool business and vacation time


이 말은 ‘유무상생‘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 개개인은 정형화된 실체가 없고 오직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모습을 달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본질적 실체를 갖지 않는 비정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즉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난다’는 것은 뭔가에 ‘대비되어 모습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판타 레이(Panta rhei, 모든 것은 흐른다)’라고 했던 그리스의 철학자인 헤라클리투스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는 세계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 그래서 ‘동일한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 그는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는 영속적이고 역 동적인 상호작용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빛은 어둠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이 둘이 서로를 규정 짓는 기준은 그것들이 지닌 ‘객관적 실재성‘이 아니라 그것들 간의 흐름, 즉 관계이다.

철학뿐 아니라 물리학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생명은 원자에서 시작하여 분자로 진화하고 분자에서 세포로 그리고 지금의 유기체로 진화하였다. 그리고 유기체는 대부분 빈틈이 없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양자역학에서는 유기체의 가장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원자에 대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원자는 단단한 실체가 아니고 속이 텅 비어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는 아주 작은 에너지 입자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선풍기가 빨리 돌아가면 날개와 날개 사이의 공간이 보이지 않고 단단한 둥근 원반처럼 보이듯이, 원자도 원래 텅 빈 공간(보통 작은 방의 크기로 보면)이지만 작은 입자들(소금 알갱이 정도의 크기)이 빠른 속도로 그 공간을 날아다니기 때문에 단단한 물질로 인식된다.

양자역학의 놀라운 발견대로라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들은 물질이 아니라 ‘공간과 에너지 그리고 속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사용한 재료는 ‘물질‘이 아니라, 끊임 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공간, 에너지, 속도’인 것이다. 이에 대해 양자역학의 창시자 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자 혹은 최소단위의 입자들은…… 여러 가지 사물들 혹은 사실들이 아니라, 가능성 혹은 잠재성의 세계를 구성한다. 원자는 사물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물질이 아닌 ‘에너지 패턴’ 들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인간이 가진 인지 능력의 한계로 인해 세상이 ‘사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물은 독립적이고 배타적이다. 그러나 이 우주는 형체가 없는 에너지들의 ‘관계와 변화‘ 다시 말해 ‘연결과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는 끊임 없이 연결되면서 동시에 흐르고 있다. 단 일초도 정지되어 있지 않고 말이다. 머릿속에서 이에 대한 이미지가 즉각 그려지지 않는 것은 우리 인간이 가진 인식력의 한계 때문 이다.

지금 책 읽기를 잠시 멈추고 가까운 곳에 있는 거울을 보라. 자신이 고정된 형체를 갖춘 존재가 아니라 텅 빈 공간에 수 많은 에너지 입자들이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이는 존재라고 상상을 해보라.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인 ‘실상(實相)’이다. 실상은 우리에게 우리가 ‘사물로서의 세계’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세계’ 속에 살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그렇다면 ‘과정으로서의 세계’에서 과정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물은 일정한 형태를 가진 정형화된 존재이지만 과정은 일정한 형태가 없는 비정형화된 존재이다. 그래서 '과정으로서의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성을 가지고 끝없이 ‘펼쳐진다’.

양자역학은 노자의 유무상생과 헤라클리투스의 '판타 레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셈이다. 노자와 헤라클리투스는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오직 철학적 혜안만으로 세상의 보이지 않는 섭리를 정확히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수백 년 이상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어쨌거나 노자의 유무상생을 중심으로 줄리언의 ‘멋진 어우러짐’, 헤라클리투스의 판타 레이,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의 양자 역학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진리를 애기하고 있다.

‘세계는 독립적인 사물들의 집합소가 아니다. 서로 대립적인 것들(유무)간의 멋진 어우러짐(상생)이 일어 나는 곳이다. 또한 세계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채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펼쳐짐 속에서 관계와 변화(연결과 흐름)로 존재한다.’

이러한 진리가 주는 의미가 자못 벅차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것 때문에 존재한다. –그러니 싫어하는 것은 무조건 배척하고 좋아하는 것만 가지려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으며 또 계속 흐르고(변하고)있다.

 

Fast train moving in tunnel

 

그러므로 무엇 하나 고정되거나 틀에 박힌 게 없는 것이 세상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로 고정되 거나 틀에 박힌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내일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른다. 오늘 혹시 불운하다 해도 그것 때문에 내일 더욱 큰 행운이 올 수도 있다. 그래서 늘 주눅 들지 않고 해 볼만 한 게 인생이다. 나는 유무상생을 이 정도로 해석한다.

오늘날 평범한 중년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일정한 모습으로 정형화되어 간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도 고정된 인식의 틀을 갖게 된다. ‘이 나이에 뭐 그런 것까지……’라는 표현은 이런 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언어습관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거스르는 것이다. 서두에서 물처럼 흐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연의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야 함은 물론이고 그 전에 스스로가 물처럼 일정한 모습을 갖추지 않은 존재여야 한다고 했다. 이 유무상생의 법칙은 그 두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법칙이다. 그래서 그만큼 중요하다.

그대는 거울 속에 비친 바로 그 모습이 아니다. 그대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이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그저 무심히 바라보는 세상이 고요한 듯 보여도 끊임 없이 ‘펼쳐지고’ 있다. 그대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삶이 불운하다 해서 영원히 그럴 것이 아니요, 지금 행운을 얻었다 해서 그 또한 영원할 것은 아니다.

이 유무상생의 섭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오직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그대의 관뚜껑에 못을 박기 전까지 그 누구도 그대를 ‘무엇이다‘ 라고 정의할 수 없게 하는 것, 그것뿐이다..

 

Get Email Notifications

No Comments Yet

Let us know what you th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