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의 재미 있는 전략 이야기] 스트라테구스(strategus)의 출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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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3월 11일

전쟁이란 조직화된 전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의 연장으로서 싸우는 것이다. 따라서 쌍방은 격돌하기 전부터 문제해결을 위해 움직이고 승리를 거두기 위한 태세를 미리 갖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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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인 측면에서 투쟁과 전쟁을 구분하는 역사학적인 경계선이 있다. 조직화된 전사들이 정치의 수단으로서 벌이는 싸움이 전쟁이 되려면 전체를 통솔하는 지휘관이 있어야 하며, 그의 지휘아래 병사들이 진형을 짜야 한다. 진형을 짜는 순간부터 병사들은 전술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진형은 곧 병사들이 일정한 규율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규율이야 말로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승리를 위해 특정 전사 집단이 개발한 진형과 규율이 바로 전략의 핵심요소인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초기의 전쟁은 경제활동의 의미를 가진다. 대부분 상대 집단이 가지고 있는 땅과 재산, 노동력에 대한 약탈을 목적으로 한 소규모의 다툼이 인간 전쟁의 시초였을 것이라는 데는 큰 이의가 없을 듯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외에 여러 정치적 이유로 전쟁이 일어난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라도 전쟁의 본질적 목적 중 하나는 의례 생존과 성장을 위한 경제적 활동이었음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프로이센의 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명저 ‘전쟁론’에서 전쟁을 정치의 연장이라고 했지만 인간들을 지배하는 gene(유전자)과 meme의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 경쟁 상대와 투쟁에 승리하고 궁극적으로 환경(자연)의 선택을 받아 진화하려고 했던, 과거의 본능이 투영된 ‘진화의 연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The White House on a beautiful summer day, Washington, DC.

인간의 역사에서 체계를 갖춘 국가와 국가 간의 대규모 전쟁은  약 2,500여전부터 기록되기 시작했다. 영국의 전쟁사학자인 리델 하트에 따르면 서양 역사에서 최초의 대규모 전쟁은 ‘마라톤 경기’의 유례가 된  2차 페르시아 대전쟁이다. 기원전 1000년 경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트로이 전쟁을 최초의 대규모 전쟁으로 보는 시각도 있겠지만 트로이 전쟁은 역사가 아닌 가상의 이야기로 알려진 호메로스의 시 ‘일리아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2차 페르시아 전쟁을 최초의 대규모 전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 주장한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소국에 지나지 않던 그리스의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침공한다. 당시 페르시아에 예속되어 있던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 사이에 반란을 부추기지 못하도록 가르치기 위한, 대국 페르시아의 입장에서는 비교적 소규모의 원정이었다. 반란을 일으켰던 두 도시 중 에레트리아는 신속히 점령당했으나 두 번째 도시인 아테네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 전쟁은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처럼 마라톤 들판의 전투에서 아테네의 명장 칼리마코스와 밀티아데스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군을 격퇴한 것으로 일단락된다.

마라톤 평원에서 원정군인 페르시아군은 보병과 기병을 합쳐 25,000명 정도였으며 그리스 연합군은 아테네군 9,000명에 플라타이아 군이 600명으로 수적으로 열세였다. 이러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군은 그 때까지 언제나 페르시아군에 대항하는 최고의 자산인 우수한 장갑과 긴 창을 이용한 독특한 대형으로 페르시아 군을 자신들이 타고  온 배로 도주하지 않을 수 없도록 저돌적으로 선제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페르시아는 대군임에도 아테네 보병의 무모하리만큼 저돌적인 공격에 당황하여 밀리기 시작하고 삽시간에 6,400명이 전사하고 만다. 그에 반해 공격을 감행했던 그리스 보병의 전사자는 믿기 어려운 숫자인 192명에 불과했다고 한다.Beautiful Parthenon in Greece on a summery day

2차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다리우스 대제는 반란을 일으킨 에레트리아를 응징하기는 했지만 아테네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하고 기원전 486년에 죽게 된다. 페르시아의 관점에서 보면 아테네는 새로운 범죄를 저지른 것이었고 이에 대한 응징의 임무는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에게 물려졌다. 2차 페르시아 전쟁 이후 10년 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엄청난 대군을 수륙으로 이끌고 그리스 연합국을 정벌하기 위한 3차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다.

3차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2차 때 보다 더 굴욕적인 패배를 하게 되는데 중요한 전투로는 지상군간에 벌어진 테르몰필라이 전투와 플라타이아 전투가 유명하며 해상에서는 세계 3대 해전에 언제나 첫 번째로 꼽히고 있는 살라미스 해전이 유명하다.  테르몰필라이 전투는 3차 페르시아 전쟁 초기에 벌어진 지상전으로서 스파르타의 레오디나스 왕이 이끄는 정예 스파르타군과 주변의 펠레폰네소스 동맹군 등을 합쳐 약 7,000명의 군대로 150,000명의 페르시아 기병과 보병을 상대했다. 용맹한 전투영웅이지만 신중한 전략가이기도 한 레오디나스 왕은 정찰을 통해 15만의 대군과 광활한 평야에서 싸우는 것이 무모함을 깨닫고 전략적 전투지점으로 테르몰피라이 협곡을 선택했다. 지금은 해안선이 많이 변했지만 기원전 480년 경 테르몰필라이 협곡은 절벽과 바다 사이에 위치 한 좁은 골짜기였다. 

데르몰필라이 전투는 좁은 협곡이라는 지형을 선택하여 페르시아의 수적 우세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스파르타군은 ‘불사신’이라 불리는 페르시아 정예군의 정면 공격을  격퇴하였다. 이를 통해 페르시아군에게 엄청난 희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리스 반역자의 도움으로 페르시아군 10,000명이 협곡을 우회하여 스파르타군을 협공하면서 레오디나스 왕이 이끄는 정예부대는 치명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포위될 것을 미리 간파한 레오디나스는 포위가 완성되기 전에 동맹군들을  후퇴시키고 자신은 전투에서는 최후의 1인까지 장렬하게 싸운다는 스파르타의 군사적 이상을 실행에 옮기며 스파르타의 정예군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다. 표면적으로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은  패배하였으나, 내용적으로는 15:1이라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물적, 심적 피해를 페르시아에 안겨 주어 그 후 1년 뒤에 있을 플라타이아 전투의 승리를 위한 밑거름이 된다.Destroyed place after a catastrophe with man and  burning flambeau concept

한편 크세르크세스는 500여 척의 엄청난 규모의 수군도 함께 진격을 시켰다. 게다가 비록 2만여 명의 정예군을 잃는 큰 희생을 치렀지만 어쨌든 페르시아군은 테르몰필라이 방어선을 뚫고 아테네로 진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 수륙에서 그리스를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로서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 때 그리스 연합의 지휘관 중 하나인 아테네 출신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이중간첩을 활용하여 페르시아 수군에게 거짓 정보를 퍼트려 적을 분산시키고 주력군을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하여 적을 대파하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날씨도 그리스 해군의 승리에 큰 몫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비록 테르몰필라이 전투에서 승리는 했으나 큰 희생을 치렀고, 또 살라미스 해전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패를 당한 뒤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지상군을 그리스에 남겨 두고 본국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 지상군 마저 테르몰필라이 전투의 영웅 레오디나스 왕의 조카인 파우사니아스에게 테르몰필라이 전투 이후 딱 1년 뒤 벌어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게 된다. 그 이후 작은 전투가 몇 차례 더 있었다고는 하나 사실상 플라타이아 전투를 끝으로 제 2차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이 전쟁을 통해 그리스는 지중해 주변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 글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전문가 이건호님이 기고한 연재물입니다. 디지털 비즈니스 생존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전략 이야기를 주기적으로 들려줄 예정입니다. 글을 보고 의견 있으면 아래 댓글 혹은 hello@performars.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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